애물단지에서 문화 공간으로
공업지대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여행객이 뉴욕에 도착하면 뉴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아름다운 조각상과 거대한 스케이트장, 상점과 다양한 레스토랑 및 NBC 스튜디오를 포함하고 있는 록펠러 센터와 더불어 꼭 찾게 되는 첼시 마켓(Chelsea Market)이 있다. 뉴욕의 다운타운에 위치한 첼시 마켓은 본래 유명 쿠키 브랜드인 ‘오레오’를 만든 회사, 나비스코가 1900년경 세운 공장이었다. 1958년 나비스코가 뉴저지에 현대식 공장을 지어 이전한 뒤 40년 가까이 방치됐다. 

1990년대 초반 폐허가 된 과자 공장이 쇼핑 몰로 탈바꿈해 지금은 뉴욕의 핫(hot)한 플레이스로 거듭났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최신식으로 리노베이션 했으리라 생각하면 오해다. 외관은 낡은 벽돌 건물을 그대로 유지한 채, 안에 들어서면 진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천장에는 예전 공장에서 쓰던 낡은 선풍기가 걸려있고, 중앙 홀엔 배수관으로 만든 폭포에서 물이 콸콸 쏟아진다. 군데군데 벽을 뻥 뚫은 흔적도 남아있다. 따라서 첼시 마켓은 빈티지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오래된 친구처럼 꾸밈없이 편한 분위기를 뿜어 내는 곳이다. 

첼시와 미트패킹 지역엔 또 다른 '재생'의 바람이 불었다. 서울역 고가도로를 철거하는 대신 공원으로 조성하는데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지상 2, 3층 높이의 쓸모 없는 고가철도에 잔디와 나무를 심어 생태 공원으로 꾸민 ‘하이라인(Highline)’ 프로젝트다. 맨하튼 서쪽에서 첼시와 미트패킹 지역을 관통하고 있는 하이라인 파크는 1930년대 이 지역 화물 수송을 위해 건립됐다가 1980년대 운행을 멈췄다. 이후 고가선로는 야생식물이 멋대로 자라고 쓰레기가 버려진 도심 흉물로 방치됐다. 줄리아니 시장 시절, 폐허가 된 철로를 철거하려 했지만 마을 주민들의 제안으로 되살아났다. 그들은 시민단체 ‘하이라인 친구들(Friends of the High Line)’을 결성, 이곳을 보행자 전용공간으로 꾸미는 계획을 진행해왔다. 그들에게 하이라인은 쓸모 없다고 버려야 할 낡은 산업폐기물이 아니라 지켜야 할 하나의 유산이었다. 따라서 하이라인 파크의 경관을 꾸민 원칙은 유산으로 남겨진 철로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생태계를 조성한 것이다. 잔디, 관목, 다년생 식물과 나무들이 색의 조화를 이루며 심어져 있고, 곳곳에 얇게 흐르는 물의 공원, 형형색색 꽃 길 등 구간마다 색다른 테마가 있어 보고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의자 하나, 나무 한 그루 모두 디자인 감각이 살아 있어 얼마나 공을 들여 조성했는지 걸을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이처럼 하이라인의 성공은 전 세계 도시 재개발 기획의 전환점이 됐다. 물론 이 프로젝트에는 하나의 롤 모델이 있었다.  

하이라인 프로젝트
하이라인 프로젝트

애물단지에서 문화 공간으로

프랑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e)’가 그곳이다. 프롬나드 플랑테는 옛 바스티유 역에서 뱅센을 거쳐 베르뇌유레탕을 이었던 옛 벵센 철도 위에 조성된 공중정원이다. 이 노선은 1969년 운행을 종료하며 구간이 폐쇄됐다. 특별하게 관리하지도 않고 사람이 찾지 않게 되면서 근대화된 도시의 상징물이자 문화유산이었던 고가철도는 지역의 흉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1년 취임한 미테랑 대통령의 문화정책 ‘그랑 프로제(Grand Projects)’와 연결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보존 결정에 따라 파리시의 주도하에 버려진 고가 철교를 철거하지 않고 세계 첫 공중정원으로 재탄생됐다. 
그렇다고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고가 철도의 녹지화로만 끝나지는 않았다. 이 지역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다른 도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긴 구간에 녹지공간과 휴게공간이 들어서면서 시민들은 휴식공간을 얻었으며, 고가철교 바로 밑 공간은 지역 예술가들의 공방과 갤러리, 아트샵, 카페 등이 있는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슬럼화됐던 지역이 휴식과 즐거움을 주는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과 결과는 다른 많은 도시재생사업에 영감을 주고 있다. 뉴욕에는 ‘하이라인 파크’가 생겼고, 서울의 ‘서울로 7017’가 뒤를 이었으니 말이다. 산업시설을 철거하지 않고 문화 공간으로 변모시킨 최초의 시도는 인상파 작품으로 유명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라 할 수 있다. 기차의 속도가 빨라지고 객차가 길어지면서 더 이상 철도역의 기능을 못하게 되어버려 용도 폐기된 플랫폼은 도시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1986년에 프랑스의 문화정책에 따라 세계 최고의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건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깊은 시간의 감동이 배어 있게 마련이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은 작품 감상을 넘어 100년 전 시공의 역사를 건축물을 통해 교감하고, 경제 논리로 따질 수 없는 묘한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산업시설에서 도시의 랜드마크로

영국 문화의 자존심으로 불리며 미술관 건물 자체만으로도 볼거리가 된 테이트 모던은 영국 정부의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테임즈 강변의 뱅크사이드(Bankside) 발전소를 새롭게 리모델링한 것이다. 뱅크사이드 발전소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런던 중심부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세워졌던 화력발전소로 공해문제로 인해 1981년 문을 닫은 상태였다. 1994년 현대미술관을 짓기로 결정하고 진행한 국제현상 공모에서 선정된 스위스 출신의 젊은 건축가 2명의 제안은 리모델링이었다. 이들의 리모델링 포인트는 기존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 외양을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살리며 발전소의 ‘건축적 가치와 런던 역사의 상징성을 살리자’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발전소의 외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발전소의 랜드 마크나 다름없는 99m 높이의 굴뚝, 420개의 벽돌로 이뤄진 벽면, 세로로 길게 난 창문 등이 그것인데, 외관 중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붕에 기다란 반투명 유리 구조물을 얹어 건물 내부에 자연채광을 끌어들인 정도이다. 미술관 건물 자체만으로도 명소가 된 테이트 모던은 한해 2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즐겨 찾는 런던의 명소가 됐다. ‘행복의 건축’, ‘불안’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영국의 이상적인 비전을 담아낸 상징”, “과거를 껴안고 비전을 담아낸 건축”이란 표현까지 쓰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 다른 발전소 프로젝트로는 스페인의 카이사포럼 (Caixa Forum in Madrid)을 들 수 있다. 이 발전소는 1899년에 지어져 마드리드의 얼마 안 되는 19세기 산업시대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세계적 금융 그룹인 라 카이사(la Caixa) 은행의 문화 재단은 2001년에 마드리드 프라도 거리에 위치한 발전소를 인수하여 외관을 보존하면서 현대미술관으로 변모시켰다. 따라서 이 건물은 시간과 공간의 꼴라주 같은 느낌이 든다. 아래 부분의 따뜻한 연갈색 조석조는 외관이 품고 있는 100년 전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그 위에 올려진 짙은 갈색으로 녹이 슨 코르텐 강판은 시간의 무게를 확인하게 한다. 건너편 왕립 식물원의 연장선으로 채택된 녹색의 버티칼 가든은 이 장소에 도시의 현재를 맞이하며, 지면과 떠있는 매스 하부 사이로 보이는 무채색의 금속성 마감재료는 머지 않은 미래를 소환한 듯하다. 이 24m 높이의 수직 정원은 프랑스의 벽면녹화 예술가인 패트릭 블랭크와의 협업으로 도시의 평면적인 조경을 입체적으로 카이사 포럼에 드리우게 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그로테스크한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카이사 포럼의 기존 내부 공간은 발전소 대신 현대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됐다. 

카이사 포럼은 옛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기존의 건물을 최대한 유지한 채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해 건물 자체의 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보존했다. 건물이 갖고 있는 흔적을 지우지 않고 역사성이 이어지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런 사례를 모델로 서울의 당인리 화력 발전소도 2020년 복합문화공간 개관을 목표로 리모델링에 들어간 상태이다.

미술 전시관으로 재탄생한 유럽 최대 규모의 가스저장고 가소메터
미술 전시관으로 재탄생한 유럽 최대 규모의 가스저장고 가소메터

공업지대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독일 루르지역이 유럽의 공업 중심지에서 문화 중심지로 변신한 배경에는 폐허로 변한 산업시설을 철거하지 않고 오랜 시간 적절한 활용도를 창안해 과거와 현재, 추억과 휴식을 전해주는 공간을 도시 곳곳에 조성했기 때문이다. 루르지역의 중심 도시인 에센(Essen)의 서쪽에 위치한 오버하우젠(Oberhausen)은 루르지역 최초의 제철소가 건립될 정도로 철강과 탄광이 크게 발달한 곳이다. 라인-헤르네 운하로 통하는 항구가 있고 하노버와 베를린을 왕래하는 간선철도가 운행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이 같은 독일 북서부권 중공업을 주도한 오버하우젠이 문화관광객으로 넘쳐나게 된 원동력은 미술 전시관으로 재 탄생한 유럽 최대 규모의 가스저장고 가소메터(Gasometer)를 빼놓을 수 없다. 가소메터는 1929년 철강 등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해가스를 저장, 배출하는 시설로, 높이 117.5m, 둘레 67.6m, 저장공간 34만7000㎥, 면적 7000㎡ 규모로 조성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 화재 등을 겪은 기념비적 산업시설로 가동됐지만 에너지 공급방법의 변화에 따라 1988년 문을 닫았다. 워낙 웅장한 가스탱크인지라 가동 중단 이후 철거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버하우젠의 가소메터는 루르 공업지역의 도시 재생프로젝트인 엠셔파크(Emscher-Park) 계획에 따라 1993년 전시센터로 리모델링 됐다. 수준 높은 전시와 문화예술 공연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발길이 끊이지 않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가소메터라는 특이한 건축물은 다양한 종류의 예술적,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는 ‘독특한 프레임’을 제공한다. 미술, 음악, 연극 등 어떤 장르의 예술이건 이곳에서 낯선 공간이 주는 새로운 감각을 통해 재발견 되기 때문이다. 이는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공간의 힘이다.

독일로 파송된 우리나라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주로 일했던 곳이기도 했던 루르 지역의 졸페라인 광산은 독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광산이었다. 1884년부터 100년간 운영되던 광산은 1986년 문을 닫은 이후 10년간이나 죽은 땅으로 방치됐다. 하지만 1989년부터 추진된 '엠셔 파크 프로젝트'는 루르 지역을 혁신적인 건축문화와 예술적 창조성이 가미된 공간으로 부활시켰다. 20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루르 지역은 지난 2010년 EU가 선정하는 '유럽 문화수도'에 선정됐다. 숨죽였던 광산은 거대한 굴뚝이 있는 보일러 하우스를 산업디자인의 중심인 '레드닷 디자인박물관'으로 개조하며 되살아났다. 이후 엠셔파크 프로젝트가 진전되면서 박물관과 극장, 디자인학교 등 문화예술공간으로 변신해갔다. 졸페라인의 재생전략을 가장 잘 대변하는 레드닷 디자인박물관은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디자인했다. 이 박물관은 탄광의 보일러실로 사용된 건물을 그대로 활용한 것으로 녹슨 철 기둥, 벽돌, 보일러시설을 전시공간으로 꾸몄다. 세계 3대 디자인상의 하나인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의 산실이 바로 이곳 레드닷 디자인박물관이다. 

영국의 역사가인 에드워드 H 카(Edward 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역사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즈음 이러한 말을 증명이나 하듯 새로운 공간을 계획하는 건축 공간분야에서 공간의 당위성과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과 장소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최근에는 버려진 공간, 용도 폐기된 산업시설, 공장이 이전한 곳 같은 낙후된 지역이 관심 대상지로 부각되면서 독특하고 매력적인 장소로 탈바꿈하는 것을 핵심전략으로 그 공간이 가지는 ‘역사성과 장소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또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오랜 화두가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산업시설의 재생은 기능이 형태를 규정짓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지만 이는 21세기 최대의 화두인 환경문제의 연장선이자 오래된 건축물의 시간과 공간의 재생을 통해 미래를 확신할 수 있기에 이를 ‘오래된 미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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