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infiniti_s sries [fishbowl _ vase series 3] 162.2x112.1cm oil on canvas 2017
New infiniti_s sries [fishbowl _ vase series 3] 162.2x112.1cm oil on canvas 2017

벨록(Belock)은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가 1907년에 발표한 소설 「밀정 The Secret Agent」에 나오는 러시아 아나키스트이다. 영국에서의 그의 임무는 자오선의 기준인 그리니치 천문대를 폭파하는 것이다. 공적 시간이 갖는 권력적 속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생생한 상징으로서, 무정부주의자의 공격 목표로서 벨록에게 그보다 더 적절한 대상은 없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콘래드는 결국 공적 시간과 사적 시간이 빚는 팽팽한 갈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는 일전에 최울가의 회화를 ‘아나키적인 세계’라고 평한 적이 있다. 물론 여기서 아나키적 세계란 화면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무질서를 표방한 듯 중요성이나 크기의 구별, 비교의 기준이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해석도 역시 가능할 것 같다. 최울가는 물론 정치적 아나키스트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미학적으로 이 시간을 문제삼고자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최울가에게 있어 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비균질적이며 가역적이다. 그의 화면 위에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응축되거나 뒤죽박죽 뒤엉켜 있다. 그래서 시간은 현재가 과거를 앞지르기도하고 꿈이나 기대 같은 미래가 과거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기도 한다. 최울가의 화면은 살점을 철저하게 발라먹은 생선 가시처럼 앙상한 선(線)적 형상으로 가득하게 되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하다. 바로 이 형태가 최울가 회화의 존재방식이다. 대부분의 회화는 평면공간 속에서 발생하므로, 지나간 사건의 경험, 잃어버린 시간의 공허함, 그리고 함께 삶을 공유했던 사물, 동물 등과 가졌던 환희와 오욕의 시간을 그려내기는 힘들다. 하지만 최울가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ourst)의 말에 공명이라도 하듯이, 말하자면 회화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하나의 장소를 점유하는 존재, 그러니까 공간 속에서 할당되어 있는 제한된 장소보다는 훨씬 넓은 장소(……) 즉 시간이라는 차원을 점유하는 존재로 그릴 것’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려진 대상들의 공간적 살점들을 다시 회복하려 애쓰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선적인 표현방식만이 공간을 점유하려는 욕망을 이겨낼 수 있으며, 그러한 비균질적인 시간은 자명종, 별, 화분, 과일, 개와 고양이, 식탁, 텔레비전, 고물 라디오 등의 선형으로 공간을 점유한다. 그가 거친 드로잉 형식을 취하는 이유도 그것들을 단지 물질적인 형태로만 남기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New infiniti_s sries [fishbowl _ vase series 2] 162.2x112.1cm oil on canvas2017/New infiniti_s sries[This is not the end 2] 162.2x112cm oil on canvas
New infiniti_s sries [fishbowl _ vase series 2] 162.2x112.1cm oil on canvas2017/New infiniti_s sries[This is not the end 2] 162.2x112cm oil on canvas

최울가의 그림 속에는 두 가지의 태도로 짝지어진 여러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다. 어린아이의 천진함과 어른의 지각적 세계가 그것이요, 원초적인 프리미티브즘과 현대적인 구성이 그것이요, 비균질의 드로잉과 균질적인 화면의 색채가 그것이요, 완성과 미완성의 범위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쉽사리 섞일 것 같지 않은 대립적 요소들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듯 최울가의 화면 속에서는 함께 어울려 나타난다. 이것들을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절제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시각적 양상뿐만 아니라 청각적 양상도 개입한다. 이 고집스런 동반관계는 작가의 열정적인 흥분과 비범한 조형적 감각이, 일상에 관한 색다른 우의가 있다. 그의 작업을 추적해 보자면, 우선 그림의 바닥 면은 매우 신중하게 선택된 색채들-White, Black, Blue, Red, Grey로 공들여 균질하게 칠한 다음, 마치 본능적이거나 되는대로 그린 듯 사물과 동물의 형상을 자유분방한 선으로 그려나간다. 이 그림들은 마치 어린아이가 공책에 흔해빠진 이야기를 조악하게 그려놓은 데생을 확대해 놓은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종종 그것은 우스꽝스럽고 소란스럽게 과장된 낙서화(graffiti)와 한 쌍을 이루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토록 생생하고 환희에 찬, 때로는 그린다는 원초적인 행위에 충실한, 때로는 소박하거나 특이한, 때로는 일기를 쓰는 듯한, 하지만 애초부터 점잖은 미술은 고려하지 않은 듯한 그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최울가 회화의 몇 가지 본질적인 가치들을 발견한다. 맑은 영혼, 자유,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 기술적 초월성, 순수, 예술적 에너지 따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의 그림이 갈무리되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아마 그의 작품은 주지하다시피 원생미술(art brut), 원시미술(primitive art), 낙서화(graffiti), 자유구상(figuration libre) 쯤으로 묶여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흐름들 밖에서, 특히 근작에 자주 등장하는 양상들을 주의 깊게 살펴봄으로써 차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우선 꿰맨 듯한 사각의 색면들이 여기저기 화면을 침범하면서 기존의 느낌을 반전시킨다. 이 색면들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이 색면들이 자유분방하고 다소 무질서해 보이는 선묘들을 제어하면서 긴장과 이완의 역할을 구축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색면들이 스케치 북을 연상시키면서 화면을 드로잉 내지는 선형상 (先形像, pre-figuration), 즉 작품이 완성되기 이전의 예비적 단계로 환원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정확하게 말해, 완성에 이르지 않은 것(non-finito)이 아니라 완성의 결여태로서의 ‘단편’을 의식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는 불충분한 표현이 아니라 미완성이 지닌 대담한 표현만이 자아낼 수 있는 극적인 울림, 즉 그의 작품이 지닌 창작의 가장 근원적인 의지를 우리에게 직접 제시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울가의 작품이 ‘아나키적 세계’, ‘원초적 순수’, ‘원시주의’라는 평을 듣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또한 그의 화면은 두꺼운 캔버스의 옆면까지 지속되면서 2.5차원의 공간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세계로 확대되며 액자 따위로 제한되지 않는, 결국 그 무엇으로도 구속 할 수 없는 회화의 자율성을 구가하고자 한다.  

 

New infiniti_s sries[A morning news paper] 162.2x130.3cm oil on canvas 2017
New infiniti_s sries[A morning news paper] 162.2x130.3cm oil on canvas 2017

최울가의 작품 하나하나는 작가의 일상을 지칭한다. 더불어 우리는 작가의 일상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공감한다. 박제된 일상의 굴레를 벗고 살아 숨쉬는 일상을 대면하는 것, 이것이 최울가 회화의 진면목이다. 사물의 재현적 묘사를 넘어서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선과 색채로 표출된 그의 회화는 엄청난 예술적 에너지의 응집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동시대 인간 삶의 보편성을 이끌어내어 생기를 불어넣는 최울가의 그림들은 바로 작가 자신의 실존적 에너지의 구체적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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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울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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