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부호화로 그려진 동양화 - 물화物化


송윤주의 동양화는 모두 작가 자신이 즐겨 찾는 공원과 작업실 주변의 자연공간을 다분히 지도화 한 그림이다. 주어진 사물의 대상을 재현한 그림이 아니라 그 대상을 간략하게 부호화해서 표기하듯이 그려 넣었다는 느낌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조감의 시선으로 기입되어 있어서 흡사 나무를 심듯, 파종을 하듯 약호화 된 대상들이 가지런히 박혀있다. 그려진 그림이자 공들여 쓴 문자이기도 하다. 작가는 익숙해진 특정 장소를 채우고 있는 세세한 대상들, 그러니까 작은 건물과 다리, 물, 여러 종류의 나무와 구조물 등을 표기해두었다. 그곳을 거닐던 순간의 감정과 당시의 추억과 기억의 멀미, 자연과 자신의 신체가 결합해서 만들어진 사건들, 이른바 ‘물화物化’된 흔적이 녹아 있을 터인데 그것을 총체적으로 이미지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장자는 예술적으로 승화된 주관과 대상의 만남의 순간을 ‘물화’라고 불렀다. 그 결과물이 흥미로운 상형문자이고 재미있는 상징적 기호 또는 깜찍한 픽토그램이 뒤섞여진 그림으로 나왔다고 본다. 

경안원(慶安園), Ink, pigment, scratched on Korean paper, 158x194cm, 2017
경안원(慶安園), Ink, pigment, scratched on Korean paper, 158x194cm, 2017

무념의 공간에서 그려지는 형태의 아름다움
 

수십 번의 호분 칠이 스며들어 견고하고 매끄러운 질감과 견고하고 투명한 바탕 면을 형성한 장지 위에 한자(상형문자)나 모종의 기호들이 도상화 되어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 상형문자이자 팔괘이고 부호이자 픽토그램과도 같은 이미지들이 넓은 땅 위에서 풀처럼 자라나는 화면이다. 형태의 아름다움이 무형의 공간에서 자유자재하게 구성되면서 그대로 풍경이 되었다. 여백의 느낌을 풍성하게 마련한 바탕은 미묘한 광택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고 동시에 미끈하고 예민한 물성 역시 촉각적으로 전이된다.

이미 주어진 바탕 면 자체가 스스로 오브제화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 위로 검정의 먹색과 먹선이 주조로 깔린 화면 속으로, 몇 개의 색채를 머금은 원형이나 일련의 기호들이 감각적으로, 매끄럽게 개입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 기호들은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응고되어 있다. 흡사 인쇄된 것처럼 정교하고 정밀하기도 하다. 간혹 어느 부위를 사포로 뭉개거나 흐릿하게 처리해 놓았다. 그 스크래치 된 흔적은 약간의 흔들림, 시간의 흐름, 소멸되는 존재의 자취, 어른거림이나 사라짐 등을 암유한다. 주역 64괘에서도 원형이미지들은 반복해서 겹치거나 소용돌이치듯 포개져 있다. 그것 역시 음과 양의 기세와 이동 등을 암시하는 구성일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이 살고 체험한 주변 자연 풍경을 한자와 일련의 상징 부호로 번안해서 풀어놓았다. 전서를 좀 더 그림에 가깝게 다듬어 상징화한 후 이를 공간에 배치해서 풍경을 구성하고 있고, 직선과 곡선으로 기호화한 그림이다. 다분히 의고적인 뉘앙스가 짙게 우러나는 이 그림은 이른바 상형문자인 한자 부호가 현대적인 추상화 혹은 특이한 문자도로 환생하고 있음을 가시화한다. 

 

심리작용의 개입으로 만들어진‘현상의 경험’- 산수화

산수화의 본래 의미는 기억 속에 남은 자연의 장면들을 상기하는 즐거움에 있다. 시각적 인상을 객관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작가의 심리작용에 개입해 만든 자취와 사라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고착시키고, 그 기억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산수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었던 셈이다. 또한 모든 것은 실재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았기에  그것을 쫓는 것은 결국 선이어야 했다.

여기서 선은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이 된다. 그래서 동양화는 사실적이기보다는 심리적 또는 지적 경로를 통과해서만 해독될 수 있는 그림이었다. 정신적 활력을 통해 완성되는 그림이기에 주어진 화면에 그려진 대상은 일종의 기호에 해당한다. 송윤주의 그림 또한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자연을 보고 이미지화하는 방식의 추이를 쫓는다. 자신이 마주한 자연 공간과 그 위를 덮치는 시간의 흐름과 마음의 흐름, 의식의 흐름을 선으로, ‘역’의 형상으로 추려내고자 한다. 부단한 변화의 굴절을 겪어내는 현상의 이미지화! 

흐름(流) Flow, 90.9x72.7cm, Ink, pigment, scratched on Korean paper, 2017-
흐름(流) Flow, 90.9x72.7cm, Ink, pigment, scratched on Korean paper, 2017-

송윤주 작가가 그린 산수화의 새로운 시도

동양화에서 형은 사물이나 사람의 외재적인 모습이며 그러한 모습이 작품을 통해 재탄생하게 된 것을 형상이라 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린다 함은 바로 형상 너머의 ‘신神’을 전하는 것이다. 신은 형상에 내재된 정신적 함의, 즉 생명 혹은 사물이 운동하는 내재적 요인 및 생명의 본질을 일컫는다. 그런데 신은 형태를 초월하여 존재하므로 이것의 인지를 위해서나 표현을 위해서는 수양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사물에 내재한 정신적 요소를 작품에 옮겨내는 것에는 이른바‘전신’의 기법에 대한 요구가 뒤따랐던 것이다. 송윤주의 그림 역시 나름 자기가 보고 체득한 자연 현상 너머의 본질이랄까, 정신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동양화 전공자라면 당연히 그런 고민과 모색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작가는 산수화 제작과 유사한 목적 아래 그 자연을 품고 있으며 아울러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주역의 논리, 시간의 흐름과 일획의 선, 전신사조, 그리고 서화동원론(『주역』에 근거해서 서법이 탄생했고 괘상은 문자의 시조요 만물의 근원이다. 여기서 그림은 곧 기호요 문자와 그림이 하나라는‘서화동체’가 등장한다.) 등의 여러 요소들을 탑재한 지금의 그림을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 산이나 연못, 물이나 불, 우레와 바람이 콘크리트 너머에 항상 존재”하고 있음을 새삼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시도하는 새로운 산수화의 한 변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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