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혁명시대의 그림자: 감시와 사생활 침해 & 저항하는 예술가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양효주 미술칼럼니스트
양효주 미술칼럼니스트

4차 산업혁명시대의 도래로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산업이 날로 늘고 있다. 드론,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한 고도화된 산업은 오랜 저성장에 주춤하던 자본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꾀하게 하는 등 곳곳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문턱에서 우리는 기대에 찬 청사진을 보면서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듣는다. 가령, "인공지능 이용이 증가하면서 내부자거래나 시세조종 등 불공정거래 행위도 늘 전망"(안수현, 4차 산업혁명과 자본시장의 미래: 2017)이라는 것과 “빅데이터를 통제해 악용할 경우 개인의 사생활이 사라질 수도 있으며 특히 정부나 거대 민간기업이 CCTV나 사물인터넷을 통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면, 민간 사찰 및 개인정보 유출은 향후 더 빈번해”(송선범, 뉴시스: 2018) 질 것이라는 거다. 하기야 얼마 전까지 큰 논란을 빚었던 페이스북 5천만 명 개인정보 유출 사건만 보더라도 인공지능과 방대한 빅데이터가 불특정 권력에 의해 충분히 악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개인의 삶의 지평이 그 어느 때 보다 넓어짐과 동시에 개인의 사생활 또한 가림막 없이 빠르게 노출되고 있는 이 아이러니한 “신세계”를 보면서 나는 벤담의 파놉티콘을 떠올려 본다.

 

파놉티콘(Panopticon) 

파놉티콘(Panopticon)은 1791년 영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으로,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한 것이다(위키백과). 

바깥으로 원주를 따라서 죄수를 가두는 방이 있고 중앙에는 간수들이 죄수를 감시하기 위한 원형 감시탑이 있다. 죄수의 방은 항상 밝게 유지되는 것에 반해 중앙의 감시탑은 항상 어둡다. 이 감시 장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죄수가 항상 감시 당하고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간수의 시선을 의식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한다(홍성욱: 2002). 

파놉티콘은 만인이 한 사람의 권력자의 시선에 종속되던 ‘군주 권력’과도 다르며 19세기 유럽 근대화의 물결에 따라 등장한 신흥 계급 부르주아의 막강한 ‘자본력’ 과도 다른 ‘드러나지 않은 감시 권력’을 뜻한다. 이 원리는 개인 정보를 확보함에 따라 개인을 감시하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면서 감시의 효율성을 증대시킨다. 물리적 강제에 드는 비용과 노동을 들이지 않고서도 교묘하게 개인의 정신과 신체를 구속시킬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규율의 가장 의미 있는 수확은 증폭될지 모르는 힘(불복종)을 미리 알고 제거하는 데 있다. 

 

Diego Velázquez, Las Meninas, 1656 

벨라스케스의 <Las Meninas>는 현대 미술과 현대 시각문화를 얘기할 때 항상 논의되는 작품이다. 때문에 아직도 그림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그림 왼쪽에는 커다란 캔버스가 놓여 있다. 그 옆에 화가 벨라스케스가 서 있고 그림 중앙에는 금발의 공주가 있다. 공주 옆에는 그녀를 보좌하는 시녀들과 난쟁이가 보인다. 작품명을 두고 흔히 <시녀들>이라고도 부른 데에는 전면의 시녀들의 모습이 유독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이 그림의 중요한 점은 공주도 시녀도 화가도 아닌 그림을 감상하는 자인 ‘왕의 시선’이다. 벨라스케스는 작품을 통하여 화가는 그림을 주문하고 소유하고 감상하는자인 왕에게 종속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미술의 역사상 처음으로 화가를 대상화시켜 표현한 것이다. 화가 스스로 “나는 객체일 뿐이요. 내가 그렸으나 그림의 주인은 내가 아니요”라고 밝히는 것이다. 

Diego-Velazquez-Las-Meninas-1656 (출처: 양효주 미술칼럼니스트)
Diego-Velazquez-Las-Meninas-1656 (출처: 양효주 미술칼럼니스트)

 

Edouard Manet, a Bar at the Folies- Bergere, 1881-82 

그림의 배경이자 작품명인 폴리바제르 Folies Bergere는 파리에 실제 한 바(bar) 이고 그림 속 여자는 그곳에서 일한 바텐더이다. 이 그림은 2m 가 넘는 대작이다. 보통 이런 대작은 그리는 데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그림의 주문자는 왕이나 귀족과 같은 상류층이며 회화의 대상도 단 연 주문자들의 초상이다. 그러나 마네는 사비를 들여 바텐더를 –당시 파리 사회를 구성하는 하층계급의 실체를- 회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근대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자 신흥계층인 부르주아들이 경제권을 갖고 사회의 주류세력이 되었는데, 이들은 그림을 향유하는 데 필요한 교양은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은 화가들에게 고정적인 수입을 보장하는 구매자(주문자)를 잃게 했다. 화가들은 더 이상 교회나 왕정에 소속되어 주문생산으로 그림을 그리며 먹고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때문에 마네의 그림은 현대 서양미술사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화가가 주문을 받지 않고 그린 – 주문자의 요구사항이 들어가 있지 않아 이상화되지 않은– 순전히 화가의 눈으로 바라 본 리얼리티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화면 구성을 보면 여자가 테이블 위에 손을 얹고 있고 뒤로 거울이란 장치가 들어가 있다. 여자의 모습은 정면을 향한다. 따라서 이 여자를 바라보고 그렸을 화가의 시선 또한 마땅히 정면이 되어야 맞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여자의 그림자는 옆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화가가 여자 바로 앞에서 여자를 바라본다면 여자의 뒷모습은 거울에 비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거울에 비친 남자는 마네가 아니다. 혹자는 이 남자를 두고 마네의 초상이라고도 하는데 마네는 평생 그림의 남자와 같이 수염을 기른 적이 없다) 

이 그림은 정면에서 바로 본 것과 옆에서 바라본 것 총 2개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시선의 주체는 “자본”이다. 그림이 그려진 당시의 파리의 문화는 절정으로 퇴폐적 이던 시기였다. 근대화의 물결에 따라 등장한 신흥 계급 부르주아는 막강한 자본력으로 퇴폐문화를 주도했다. 당시 파리의 대표적인 고급 바가 물랭루주와 폴리바제르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관찰자인 화가가 비스듬히 시선을 던지고 있다. 

미셀 푸코는 현대사회의 권력 특징을 이 파놉티콘의 원리에 비교한다. 그는 "우리는 파놉티콘 감시 구조의 사회 속에 살고 있다."(미셀 푸코: 2007) 라고 주장하면서 파놉티콘의 이념을 감시, 통제, 교정으로 분류하고, 이 요소들이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기본적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푸코에 이어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또한 포스트모던 사회가 포스트 파놉티콘의 질서를 지니고 있다고 이해하면서 "중앙집권제 대신 유연하고도 공간적으로 묶여 있지 않은 모바일의 감시 방식이 들어 섰으며 이에 단연 눈에 띄는 것이 CCTV이다"라고 지적한다(마리우스 리멜레, 베른트 슈티글러: 2015). 

A Bar at the Folies-Bergere-Edouard Manet (출처: 양효주 칼럼니스트)
A Bar at the Folies-Bergere-Edouard Manet (출처: 양효주 칼럼니스트)

 

아이웨이웨이, 감시 카메라 

Surveillance Camera, 2010 

이 시대에 가장 유명한 현대 예술가 중 한 명인 아이웨이웨이는 출생지인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저항의 아이콘’, ‘반체제 예술가’라는 별칭을 얻으며 명성이 높다. 그는 예술가이자 시인이고 건축가이자 미술감독이고 블로거이며 책을 쓰는 작가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중국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인권을 위해 싸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8년, 스위스 건축가 그룹 헤르조그& 드뫼론과 함께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을 디자인했지만 당국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아 개막식 참석에 제재를 당했고, 2009년에는 쓰촨성 대지진과 건물의 부실공사로 인하여 수천 명의 인명피해가 난 사건을 조사하고 이를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 및 미술로 표현한 이래로 중국 정부로부터 수 차례의 불법 감금, 협박, 폭행, 억류 등의 수난을 받았다. 당국은 그의 여권을 빼앗고 4년간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으며 현재도 그의 스튜디오 주위로 20개의 CCTV가 돌아가며 그의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있다. 

작품 <감시 카메라, Surveillance Camera, 2010>는 편집증과 관음증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는 중국 정부의 권위에 대한 그의 대응방식이기도 하다. 마오의 대리석 무덤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대리석으로 만든 이 카메라 조각은 CCTV라는 감시 장치와 사후에도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는 마오의 영향력을 오버랩시킨다. 

작품 <비디오 레코더, Video Recorder, 2010>와 <웨이웨이 카메라, WeiweiCam, 2012>는 정부의 감시카메라에 대한 역발상으로, 아이는 정부의 이러한 만행을 비디오카메라로 기록하여 공개하는 것으로 정부의 감시체제를 조롱한다. 아이는 말한다. “나의 도발에는 다 이유가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런 괴롭힘을) 침묵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감시카메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감시카메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Stills from 'WeiweiCam' 

(now offline), 2013 

관찰하는 눈은 범죄를 예방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관찰하는 눈은 피관찰자의 시간과 공간을 점령하며 이들을 ‘눈의 취향’에 종속시킨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어느 누구도 CCTV에 촬영된 장면들을 볼 수 없고, 오로지 통제실에서만 녹화되며 모니터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CCTV는 오히려, 자신이 관찰되고 있다는 분명한 암시와 대개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카메라로 인해 표준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피관찰자를 겨냥하는 것처럼 보인다(마리우스 리멜레, 베른트 슈티글러: 2015). 

이처럼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이해와 표준에 준거하여 개인을 사회가 바라는 모범 이미지로 훈육하고 교화시키는 일은 개인의 지각의 주도와 신념을 좌절시킨다. 하여 개인은 자칫 국가적 차원에서 정비한 이미지 산업의 목표물에 지나지 않게 될 수 있다. 사회 규율로 명명되는 ‘권력의 특유한 기술’에 대해 생각할 때면, 의례 감시되고 검열되고 훈육되고 처벌되고 배제되고 은폐되는 등 억눌리거나 고립된 개인의 모습을 떠올리지만, 사실 권력이 가진 최대 기술은 ‘생산’이다. 권력은 규율이라는 술책으로 개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을 최대로 얻는다(미셸 푸코: 2017). 

파놉티콘의 체제는 오래된 유산으로서 사장되지 않고 유형무형의 장치로 확산되면서 포스트-파놉티콘으로서의 새로운 양태로 유지되고 있다. CCTV, 사물인터넷, 빅데이터와 같은 고도의 분석기술에 의해 역사적 맥락과 개별적 특성에 따라 해석과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개인이 사회가 편의대로 구성한 도식 체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분석과 구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는 이 신세계에서 사는 동안 나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인간됨의 가치마저 제도가 부여한 이름으로 묶이지 않을 자유를 낙관해 볼 수 있을까?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나를 보는 ‘눈의 감시’와 ‘눈의 언어와 수사’로 가공된다. 나는 ‘카테고리’로 분류되고 ‘맞춤형’”으로 대량 생산되고 있다.

감시카메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감시카메라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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