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동상, 권태균, 서울, 1981년

 

서울과 공간

지난 100년간 한국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흔히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변화는 조선 말에 시작되어 식민지라는 강압적 조건 속에서 확산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울은 공간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삶의 바탕을 이루는 역사와 문화와 자연이 송두리째 파괴되는 커다란 변화였다. 한국에서 도시의 본격적인 형성은 일제강점기인 1930, 40년대에 이루어졌다. 이후 1960년대 들어와 서울의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공간들은 본격적으로 새롭게 재편되었고 그 속에는 질서와 혼란이 동시에 솟아나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위로부터 진행된 ‘압축된 근대화’의 결과로 형성된 공간이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모태가 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전 시대와의 급속한 단절을 추구하면서 상징적으로나마 역사의 연속성을 내보여야 했던 근대화, 서구를 발전 모델로 삼으면서도 민족주의를 추동력으로 삼아야했던 그런 근대화가 바로 우리의 근대화이며 그 근대화의 자취, 상처가 고스란히 서울이라는 공간 이곳저곳에 단호하고 다소 처연하게 새겨져 있다. 건물과 구조물, 조형물들이 그러한 풍경을 만든다. 풍경이란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게 결코 아니라 역사적으로 의도된 구성의 체계 아래 구현된다. 그에 따라 특정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와 함께 다양한 시각물들이 들어서고 또한 그것들은 그 안에서 사는 인간의 감수성과 감각을 형성하고 주조한다. 우리는 공간의 소산이고 그 결과물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삶과 문화, 사람들의 감수성과 감각을 알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떠한 구조물과 조형물 사이에서 서식하고 있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서울’이란 이정표는 단순히 지리적 장소, 특정한 공간을 지칭하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서울이란 지명은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포용한다. 서울은 대한민국 그 자체다. 그런가하면 서울은 거대한 공장 혹은 유기체다. 서울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적,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체험과 사건의 거대한 덩어리이며, 600여 년을 이어져 온 굴곡진 우리 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사실은 서울이라는 이 거대한 유기체의 역동성이야말로 우리 역사를 추동한 동력이다. 동시에 기괴할 정도로 비대해지게 서울의 몸집을 늘려버린 원천이기도 하다. 서울은 남한의 중심도시다. 서울에만 1,200만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수도권 인구는 남한 인구의 절반에 육박한다. 서울은 너무 비대하고 복잡하고 현란하고 매혹적이면서도 더러 끔찍하고 흉물스럽기도 하다. 이러한 서울의 팽창은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한편으로는 서울의 이 역동적인 힘은 그 안에 엄청난 불균등성을 은폐하고 있으며 수많은 난제를 잉태시켰다. 이제 우리는 도시가 주는 재앙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산다. 서울은 정신착란증의 도시다. 이곳은 영속성보다는 일시성의 연속이다.

그런가하면 서울은 기억상실증과 망각의 도시다. 연속성이 사라지고 파편화 된 시간의 잔해들이 뒤엉켜있다. 지나간 과거의 삶의 흔적이, 문화와 역사를 이룬 기억의 잔해들이 어디에도 묻어나지 않는 편이다. 기억이 없는 도시는 유령과도 같은 도시다. 이곳에서 수 천 년, 수 백 년 사람들이 살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공간에서 힘들게 살아냈던 흔적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없었고 오로지 새로움으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추억이 없기에 낭만도, 문화도 없고 삶도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역사적 존재 뿐 아니라 익명의 존재들이 몸으로 쓴 삶의 이력, 개별적인 존재들의 입김과 발자국, 역사에 등재되지 않은 이들의 소박하지만 절실하게 살았던 소소한 내력마저 따스하게 보듬었던 기억은 당연히 이곳에 존재할 수 없다. 역사가 부재한 공간에 현재만을 사는 유령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이 도시다. 오로지 그곳에는 ‘지금’만이 아슬아슬하게 산다. 혼돈과 일시성, 전체성을 함축하는 관료적 도시모델(통일된 전체)에 의한 지속적인 파괴와 자본가의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율성에 의해 생성되는 비이성적이고 파편화 된 도시 비전이야말로 서울의 기원이다. 규범도, 질서도, 취향도 부재한 이 ‘정체성 불명’의 정체가 오늘날 서울의 초상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과거와 부재, 현재와 현존 사이에 자리한 이 풍경은 시간 속에 잠깐씩 명멸할 수밖에 없는 시간/자연의 이치를 일깨워주는 한편 알 수 없는 무력감과 상실감을 안겨주기도 하고 동시에 과도한 변화와 망실 속에 흘러가는 동시대 서울이란 공간이 주는 기억상실증과 망각의 힘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한 개인에게 정체성과 그를 둘러싼 그 모든 것을 개인의 육체로부터 휘발시키고 이탈과 방기를 암시한다. 공간과의 친연적 관계를 상실하고 그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난 상황성을 안겨준다. 급격한 기억상실증과 신속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우리 삶의 환경이 환영처럼 출몰했다가 스러지기를 거듭하는 그런 체험을 접한다. 이 서울이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무수한 건물, 건물의 외관, 간판들 그리고 온갖 조형물들은 이 서울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정확히 반영한다. 그래서 공간이 중요하고 공간에 놓인 온갖 조형물, 공공미술이라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그것은 특정 공간의 성격, 역사와 문화,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동시에 그곳에 사는 이들의 감수성과 미적 감각을 되살리고 인간다운 삶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데 공헌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며,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저마다 장소에 대한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소는 일종의 상징이고 문화다.

 

포스코 건물 앞의 아마벨

강남의 빌딩 사이를 걷는다. 우리들의 도로는 인간다운 걸음을 거부한다. 인도라 할 것이 딱히 없다. 그것은 쾌적한 도시환경, 공간과는 다소 먼 불편하고 거칠고 더러 폭력적이자 권력적이기까지 한 공간들이다. 그 피곤한 길들을 따라 걷다 보면 으레 고층빌딩의 대로변 마다 이른바 환경조형물이란 것들이 나와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도시공간에는 이런 조각물들이 하나씩, 둘씩 얼굴을 내밀고 이제는 당연히 간판처럼 붙어있다. 마지못해 건물 사이와 앞에 겨우 끼어들어가 있는 조형물은 ‘이렇게 존재한다’는 삶의 시위성으로 대들고 있는 것도 같다. 이른바 조형물조례법의 혜택으로 가능해진 일이다.

형식적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 이 애물단지, 천덕꾸러기 자식들은 그동안 욕도 숱하게 먹었고 이런 저런 구설수에 무수히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욕을 먹으면 그만큼 질기고 긴 생존이 보장되는지 여전히 우리의 도시공간에는 조형물이 흉물스럽게 서있고 늘상 보던 작가의 작품이 여전히 반복해서 세워진다. 솔직히 말해 그 많은 조형물, 공공미술 중에서 바람직한 수준의 작품은 극히 드물다. 흥국생명 사옥 앞에 위치한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망치질하는 거인(Hammering man)’과 같은 수준의 것을 찾기는 힘들다. 광화문에 세워진 이순신장군상과 세종대왕상도 엄밀히 말해 공공조형물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것은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조형물로서의 성격이 짙다.

대부분의 공공조형물이라는 것들은 한 공장에서 일괄 납품을 한 것처럼 조악하고 획일적이며 이상하기만 하다. 문화는 없고 문화라는 껍데기만을 걸치기에 급급한 우리네 상황이 고스란히 그 조형물의 표면에 얼룩져있다. 진정한 환경조형물, 공공미술은 실종되고 그 탈을 뒤집어쓴 키치적인 조형물 혹은 사이비 공공미술들만 버글거린다. 그 공공미술은 빌딩주인의 마음먹기에 따른 것이다. 오너들이 결정해서 그저 빈자리에 ‘쿵’하고 던져놓은 것이다. 도대체 어떤 것이 떨어질지 알 수가 없다. 작품의 질, 주변 환경과의 고려 같은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좋은 작가의 작품을 신중하게 선정하려는 이도 없다. 거칠게 말해 천박한 자본의 횡포와 상업화랑의 농간, 작가들의 굴욕적 타협, 관계자들의 뇌물성 조작 등으로 처절해진 이 공공미술, 환경조형물은 솔직히 없는 것보다 못하다고 본다. 포스코 센터 앞에 설치된 프랑크 스텔라(Frank Stella)의 ‘피어오르는 꽃(Flowering Structure)’(일명 아마벨(Amabel))도 사실은 매우 좋은 작품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작품이 수 년 전 철거될 뻔 했다. 오래 전의 일이 되었지만 당시 포철 측이 이 작품을 철거하겠다는 발표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술관측이 인수거절을 하는 바람에 보류가 되었지만 회사 측은 당초의 입장을 고수하고자 했다. 물론 지금은 없던 일이 되었고 다행히 아마벨은 그 자리에 서있다. 당시 그 조형물을 철거하려던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일단 그것이 무척 흉물스럽고 난해하며 고철덩어리가 뒤죽박죽 섞여있는 것이 포철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스텔라라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도 없고 전문가들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는 이들의 지극히 편협한 사고가 강제하고 있음을 본다. 동시에 그 진정한 속뜻은 전임경영자의 잔재와 흔적 지우기란 정치적 입장이 우선했음을 나중에 알 수 있었다. 하여간 우리에겐 기업문화는 없고 목소리 큰 천박한 장사꾼들, 졸부들, 비전문가들이 조형물, 공공미술을 결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당시 많은 미술인들이 여러 이유를 들어 작품의 철거이전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철거나 존속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그보다도 이는 공공미술에 대한 매우 중요한 문제를 환기시키는 사건이 되었다고 본다. 이전에 모든 조형물 설치가 그렇듯이 애초에 작품의 구매결정과정에서의 합의 도출, 전문가의 참여와 공공적 논의과정이 생략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공미술의 기획이란 큰 틀에서 도시공간의 조형물 구성에 대한 일정한 조율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대한 논의가 생략되었음이 새삼 지적되어야 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문제다. 아울러 그 과정에 참여하는 작가와 작품들이 투명하게 경쟁되어야 하는 제도적 시스템도 필요하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성과 환경과 공간에 대한 인간중심의 사고와 문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우리에겐 사실 문화적 공간, 인간의 감각과 문화가 개진되고 확장될 수 있는 공간의 확보와 공간의 정치화가 예민한 문제가 되었다. 저급한 자본주의문화로 기형적인 우리들 삶의 공간에 공공미술이라고 들어가 앉아 있는 그 무수한 조형물들이 도대체 무얼 하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아현동 프로젝트 벽화사업 예

 

아현동 프로젝트
몇 해 전 '아현동 프로젝트‘라는 작업이 있었다. 뉴타운 재개발사업으로 헐리게 될 아현동 222번지라는 공간에 주목한 젊은 작가들이 도시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사라질 공간과 기억들을 환생하고자 하는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공간에 예술가와 일반인들이 참여해서 북아현동의 역사와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 전시를 만들었다. 따라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북아현동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 공간에 살고 있는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삶의 사연과 미시적인 개인사를 기억해 내고자 하는 일련의 그 작업은 공적 역사와 거대담론, 거시적인 기념에서 벗어나 소소한 생의 흔적을 되살려내는 작업이 되었다. 그것은 단지 미술작품, 예술가, 일반적인 기획전시의 틀에서 빠져나와 오늘날 미술이 공공장소와 사회구성원들과 어떻게 매개되어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전시를 기획하고 참여한 작가들은 또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황폐화 되어가는 풍경과, 기존 풍경을 대체하는 키치(kitsch)화되고 시뮬라크르(simulacre)화한 풍경에 주목하여, 또한 그런 풍경에 걸맞은 미술적 언어를 개발하고자 했다. 이들에 의해 도시의 얼굴이 하나씩 벗겨져 나갔다. 사실 풍경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방식이 같이 어우러져 있을 때 진정한 풍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도시풍경은 전적으로 인위적인 구성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그 같은 프로젝트는 단지 특정 공간을 소재, 오브제(objet)화하려는 것이나 주어진 물적 공간에 스며들어 머물기 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공미술프로젝트의 한 성격을 만들어나가려는 시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공공미술이란 바로 그러한 시도를 일컫는다. 단지 특정 공간을 물리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조각 작업 내지 벽화만이 공공미술이 결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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