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투자자가 한국 원화·주식 등 자산을 매도하고 있다. 주식 매각자금을 곧바로 달러로 환전하려는 외국인의 수요가 넘치면서 ‘달러 가뭄’이 이어지고 있어 원화가치는 추락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미국, 유럽 등 주요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마진콜(추가 증거금 추가 요구)이 발생한 것도 달러 수요를 부추겼다. 해외 증권사들이 담보금으로 원화 대신 달러를 요구하자 국내 대형증권사들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랴부랴 기업어음(CP)을 팔아 환시장에서 달러를 구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증권사들뿐만 아니라 시중은행들도 상당한 규모의 마진콜 요청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진콜은 투자자가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렸을 때 주가가 하락하면 금융회사가 담보・증거금을 더 넣거나 대출을 줄일 것을 요구받는 것을 말한다.

 


한·미 통화스와프로 금융시장 진정 기대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우려로 인한 ‘셀 코리아’ 양상은 1997년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한국경제가 미증유의 위기에 빠졌던 IMF 위기를 연상시킨다. 그때처럼 되어서는 결코 안 되지만 코로나19 전염병이 창궐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라 경제에 미칠 영향이 공포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바로 이 어려운 순간에 한국은행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와 600억 달러 규모의 양자 간 통화스와프 계약을 체결한다고 발표했다. 글로벌 달러 자금시장이 급격히 악화하자 전격적으로 통화스와프 계약을 한 것이다. 

이번 한·미 간 통화스와프 계약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던 2008년 10월 30일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계약에 이어 두 번째다. 

당시 통화스와프는 2009년 4월30일까지 6개월간 한시적으로 적용될 예정이었지만, 두 차례 연장되면서 2010년 2월 1일 종료됐는데, 크게 출렁이던 금융시장을 진정시켰다. 달러유동성에 대한 불안심리가 완화되고 급등세를 보였던 원·달러 환율도 안정을 되찾는 등 외환시장 안정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6.25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국을 구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주변 지역이 공산화되고 있을 때 대륙의 자락에 붙어있는 한반도 남쪽에서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살아남아 자유민주주의 모범 국가가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여기에는 국민들의 노력과 희생 외에도 미국의 도움이 작용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남침하여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우선 현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6월 29일 수원으로 날아왔다. 지프로 한강 전선을 시찰했는데, 흑석동 강둑 참호 속의 한국군 병사를 발견하고 “귀관의 임무는 무엇인가?”라고 묻자 그 병사는 “후퇴 명령이 있기까지 이 진지를 사수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에서 맥아더는 한국인들이 싸울 의지가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1950년 7월 1일 우선 대대 규모의 선발대를 부산에 상륙시켰다. 제21 연대 제1대대장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서 철도로 이동하여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 고개에 배치되었다. 첫 전투에서 미군은 500여 명 가운데 200명이 희생되었다. 한국군과 미군은 계속 밀려 7월 20일에는 대전을 빼앗기고, 그 과정에서 24사단 사단장인 딘 소장이 포로가 되기도 했다. 낙동강까지 밀려 강을 사이에 두고 처절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틈에 맥아더가 구상한 20세기의 ‘칸나에(Cannae) 전투(카르타고 한니발 장군이 로마군에 대승한 전투)’라고 불리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빠른 속도로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진격하였다. 서부전선에서는 일부 선발대가 평안북도 초산의 압록강에 이르렀고, 동부전선에서는 함경북도 혜산진과 함경남도 장진호에 도달했다. 통일이 다가온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이때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와 후퇴하게 되었고, 그 후 38선을 두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다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미국은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 등 미군의 근간을 이루는 전력을 투입했다. 한국전쟁 3년여 동안 미군 사상자는 전사 3만 3,686명, 일반사망 3,254명, 실종 및 포로 8,176명, 부상 9만 2,134명에 달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한 것이다. 

 


주한미군은 사활적인 물류루트 보호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군은 한국에 계속 주둔하면서 한국안보는 물론 동아시아에서 공산세력의 확산억지에도 큰 역할을 해 왔다. 

1975년 4월 월남 패망 후 김일성이 적화통일 위협을 노골화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철부지 대통령 카터가 집권하여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려 하였으나 주한미군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한 미국 조야의 반대에 봉착하여 포기해야 했다. 그때 우리의 우방국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비동맹을 표방하고 있던  나라들도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추진에 의아해했다. 

지금도 주한미군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한국에 주한미군은 안보뿐만 아니라 사활적인 물류루트를 보호하는데 있어서도 긴요하다. 어느 학자는 한국으로 들여오는 석유․천연가스의 대부분이 대만해협을 통과하기 때문에 이 해협이 봉쇄되면 한국의 경제 안보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군이 역내에 주둔해야만 이러한 긴급한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 

 


운명공동체는 체제와 이념이 다른 나라와는 성립될 수 없다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를 발전시키고 민주화를 이룩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유치하고, APEC, ASEM, G20 정상회의 등 굵직한 국제회의도 다수 개최하면서 지역 및 범세계적인 이슈 협의를 선도했다. 그런데 자부심 넘쳤던 대한민국이 지금 위협을 받고 있다. 

한미관계는 껄끄러워지고, 한일관계는 경색관계를 넘어서 위험단계로 빠져 들었다. 작년에 한국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 조치를 취했을 때, 이로 인해 한미일 3각 안보 공조 문제가 제기되는 틈을 타 중국과 러시아의 군용기가 독도 부근의 한국 방공식별구역(KADIZ)을 무단 침입했다. 전문가들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라는 호기를 이용하여 한미일 협력의 ‘약한 고리’인 한국의 방공식별구역 침입과 영공 침범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 사례에서처럼 한미관계가 약화되거나 주한미군이 나가기라도 하면 한국의 운명은 위협받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독도 상공 방공식별구역까지 무단 침범하는 나라와 운명공동체라는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운명공동체는 체제와 이념이 다른 나라와는 결코 성립될 수 없다. 

더구나, 마오쩌둥 반열의 1인 절대 권력을 구축한 시진핑 체제의 중국은 개혁개방 모토하에서 선린우호를 중시하였던 덩샤오핑 체제에서와는 달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꿈”이라는 ‘중국몽(中國夢)’ 기치하에 자국 중심주의의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전 세계에 커다란 고통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는커녕 외교부 대변인까지 나서서 자국이 진원지가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 있다. 

중국과의 우호협력은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공유하는 나라들과의 협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과 공조를 튼튼히 한 바탕 위에서 냉정하고 현실적인 전략을 추진해 나가야만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진다.

이강국 전) 중국 주시안 총영사
이강국 전) 중국 주시안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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