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역량, 진일보할 기회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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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디스커버리라는 제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몰했는데 특허청이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한다고 떠들썩하니 무슨 일인가 싶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간단히 말하면 가지고 있는 자료를 숨김없이 모두 공개하기 위한 의무가 소송의 당사자에게 부과되는 것이다.

공개하지 않거나 일부 자료가 누락되면 불이익을 받게 될 수도 있다. 특히 개인, 스타트업, 중소기업과 같이 대기업과의 분쟁이 벌어지면 손써보지도 못하는 입장에 처하지 않게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도록 정보의 질을 올려주는 제도이기에 스타트업의 취지와도 아주 잘 맞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 우리나라에 도입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려고 한다.

 

 

디스커버리 제도란?

디스커버리 제도는 상대방이나 제3자로부터 소송에 관련된 정보를 얻거나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 변론기일 전에 진행되는 사실 확인 및 증거수집 절차로, 증거개시제도라고도 한다. 미국 영국 등에서 재판이 개시되기 전에 당사자 양측이 가진 증거와 서류를 서로 공개해 쟁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사용된다.

정식 공판 전 소송의 당사자가 상대의 요청에 따라 관련 정보나 서류를 공개해야 한다. 합리적인 이유 없이 상대방의 서류 제출 요청을 거절하면 법원의 처벌과 제재가 있다. 소송 시작과 소송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회사는 관련된 모든 정보를 보존할 의무가 있다.

만약 증거를 파괴하거나 인멸해 증거인멸 행위(spoliation of evidence)로 인정된다면 관련된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하거나, 증거를 파괴한 자에 대해 추가 심리 없이 패소판결을 하는 등 상당히 강한 제재를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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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과 단점

쟁점의 정리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서는 소송당사자들이 상대방에 대한 정보나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기보다는 상대가 공개하도록 한다. 디스커버리 절차를 거치며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공개하면 다툼이 있는 사실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기 때문에 소송 자체가 다소 간소화되는 장점이 있다. 특히 디스커버리로 인해 미국 민사소송 절차에서 95% 이상이 정식변론 개시 전에 조정이나 화해로 처리되는 것을 고려하면 큰 장점이다.

 

개인·중소기업, 대기업·국가와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어

한국에서는 소송 전 소위 말해 상대방의 ‘사이즈’를 보는 경우가 많다. 변호사 비용부터 정보수집능력까지 개인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스커버리 제도가 시행되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낱낱이 공개해야 하므로 이런 부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히 특허소송에서 이 부분이 중요한데, 제품의 제조공정이나 화학물의 조성비, 소프트웨어 알고리즘과 같이 외부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대해 기업이 가지고 있는 문서를 공개함으로써 기술탈취가 상대적으로 어려워진다.

 

소송 지연 불가능

또한, 디스커버리에 따라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가 공개되므로 증거를 그때그때 추가하는 등 소송절차를 지연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또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소송이 진행되지 않는다. 일단 공개 후 공개된 내용만을 가지고 소송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후에는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라도 증거로 제출하는 것이 쉽지 않다.

 

소송비용 및 증거조사에 걸리는 시간

디스커버리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공개되는 정보의 양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이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력이 투입된다. 결국 미국에서 변호사 비용이 증가하는 주요인이다.

개인과 중소기업이 디스커버리를 통해 대기업과 소송이 가능해졌다고는 하지만 디스커버리를 해결할 수 있는 비용이 마련된 후에야 가능하다는 문제도 항상 제기되고 있다. 또한, 정말 비밀로 해야 할 정보가 상대방에게 공개될 수 있는 것도 문제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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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의 이용 사례

SK하이닉스 vs 램부스

SK하이닉스는 미국의 펩리스 업체인 램부스와 2000년부터 13년간 특허소송을 벌였다. 램부스는 하이닉스가 중앙처리장치(CPU)와 디램(DRAM) 간 데이터 효율 관련 기술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2000년 8월 미국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길고 긴 소송 끝에 2009년 1심 재판부가 SK하이닉스에 대해 3억 9,700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고, 이에 SK하이닉스는 항소했다.

1심 진행 중 SK하이닉스는 램부스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비침해주장을 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SK하이닉스는 디스커버리를 신청했다.

항소심 진행 중 SK하이닉스는 램부스의 자료 누락을 발견하고, 불법 자료 파기 가능성을 주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램부스가 증거를 고의로 파기했다는 사실을 인정해 1심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여전히 특허의 침해는 인정되는 상황에서 1심 재판부는 램부스의 증거자료 파기에 따라 로열티 산정을 달리해 훨씬 낮은 금액인 1억 달러를 손해료로 산정해 다시 판결했다. 디스커버리 한 번으로 로열티 3억 달러를 아낀 쾌거다.

 

삼성전자 vs 애플

삼성전자는 애플과의 소송 중 회사 보안시스템이 이메일을 자동삭제함에 따라 디스커버리 후 패배했다. 삼성전자의 회사 보안 시스템에는 모든 이메일을 2주 지나면 자동삭제하는 기능이 있었는데 이 내용이 자료 고의누락으로 인정돼 삼성이 애플을 카피했다는 애플의 주장이 모두 인정됐다.

 

LG화학 vs SK이노베이션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미국에서 전기차용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으로 붙었다. 이때도 디스커버리가 큰 역할을 했는데,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증거보존 의무를 무시하고 증거를 인멸했으며 포렌식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SK이노베이션이 증거를 훼손한 것으로 보이고, 포렌식 명령도 준수하지 않았으며 행위에 고의성이 있는 것으로 보며 SK이노베이션에 조기 패소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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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는?

특허청은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소위 ‘K-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추진 중에 있다. 특허 소송 당사자 양측이 갖고 있는 증거와 정보를 서로 공개하는 것이 핵심인데, 소송 당사자들이 특허 침해 사실과 손해 관련 증거를 효과적으로 확보해 분쟁을 종기에 종결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이 ‘특허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한 바 있다. 실제로 특허 소송을 진행할 때 특허권자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실시 중인 발명을 의미하는 (가)호발명(실시발명)을 특정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겉에서 보기에는 자신의 특허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안의 내용을 확인하기 어려워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로 인해 특허도 침해 여부를 확인하기 용이한 분야의 특허가 인기가 많다. 특허를 받아봐야 침해 입증이 어려워 특허로서의 역할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는 고비용 비밀 훼손과 같은 기존의 문제점들을 인지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자료목록 제출명령, 자료훼손 제재 강화를 통해 현행제도의 실효성은 강화하고, 법원이 지정하는 중립 전문가가 개입해 비밀은 최대한 보장함과 동시에 비용을 현실화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작년 특허권 침해에 따른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도입됐으나 이를 현실적으로 증거조사 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실효성이 높지 않았다. ‘K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으로 이러한 부분들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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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에 단비 같은 존재

얼마 전 디스커버리 제도가 소재·부품·장비(이하 소부장) 발전에 역행한다는 기사를 봤다. ‘K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면 소부장 특허가 강한 일본이 한국에 특허소송을 할 것이고, 특허권이 약한 기업들은 패소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일단 특허권이 약하기 때문에 패소할 수밖에 없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특허권이 약해도 타인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정 침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정당하게 로열티를 내면 된다.

일본이 기술력이 강하고 원천특허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한국 기업들이 그 특허를 침해할 우려가 있기는 한 걸까? 이에 대한 조사도 하지 않고 사업을 했다면 그것도 문제고, 특허를 침해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사업을 했다면 그것 또한 문제다.

직접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의 소부장 기업들이 한국에 가지고 있는 재료 관련 특허는 전무했고 이미 있는 특허들도 소멸한 지 오래된 것들이 많았다. 물론 문제가 되는 특허가 다른 곳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침해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반일감정을 내세워 상대가 일본기업인 경우, 타인의 특허를 침해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노릇이다. 집이 없다고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하면 안 되듯 남의 특허도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 특허 침해 여부를 알고 싶으면 특허를 검색하면 된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특허를 내놓고도 무자비하게 특허를 침해하는 대기업을 상대로 억울하게 발만 동동 굴러야 하는 중소기업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특허가 없어서 우리 기업들의 역량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허가 있어도 사용하기 어려운 제도하에서 특허를 받지 않는 풍토가 만연해 기업들의 역량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제도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현실화되면 우리나라의 특허 역량이 진일보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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