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고향의 정서가 묻어있는 변시지의 '제주풍경'

(좌) 변시지, 조랑말과 외족오, 100호, 1987 / (우) 변시지, 폭풍 c, 100호, 1986
(좌) 변시지, 조랑말과 외족오, 100호, 1987 / (우) 변시지, 폭풍 c, 100호, 1986

[스타트업4] 제주에 가면 꼭 한번씩 들른다는 기당미술관. 그곳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그 중 단연 으뜸으로 사랑받고 있는 작가는 ‘변시지’입니다. 변시지 화백은 1926년 5월 29일 서귀포 서홍동에서 5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고 유년시절을 제주에서 보냈습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모두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지만 선대의 노력으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섯 살이 되던 1931년 새로운 세상을 배우라는 부친의 뜻을 따라 일가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이듬해(1932년) 오사카의 소학교에 입학했고, 어릴적 서당에서 배운 한학의 기본기 덕분에 다재다능한 학생으로 통했으며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만큼 체력에도 자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소학교 시절 2학년 때 학교에서 씨름대회가 있었는데, 운동이라면 자신 있었고 이기면 1전씩 준다는 말에 솔깃해서 부친이 “너는 이겨도 조선인, 져도 조선인 소릴 듣게 될 것이다. 씨름대회는 나가지 않는 게 좋겠다"며 말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꺾지 않고 도전했다고 합니다.

첫판에 2학년 아이를 보기좋게 모래판에 눕히고 나자 일본인 학부형들이 “조선아이에게 지면 안된다”며 3학년 학생을 내보냈고, 그 아이도 이기자 이번엔 덩치가 2배 되는 4학년 학생이 나왔습니다. 한동안 오기로 버텼지만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먼저 모래판에 쑤셔 박히면서 관절에 손상을 입게 되었고 한순간의 오기로 선생님은 평생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 놀 수 없었던 선생님은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3학년 때는 아동미술전에서 오사카시장상을 타면서 가족들도 그림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일본에서 생활하고 일본의 문화에 젖어 살면서 일본음식을 먹어도 결국 한국인의 기질은 무의식적으로 캔버스에 묻어났습니다. 변 화백은 민족성이나 민족의식을 자각하기 시작한 때부터 “고향으로 가자. 내 조국으로 돌아가면 새로운 화풍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조국은 전쟁의 상흔이 너무나도 깊어 예술적 활동이 불가능하였고 전후사회가 안정되면서 귀국은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의 총장과 미대학장이 강의 제의를 계기로 귀국을 결심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결국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1957년, 서른한 살에 귀국하였고 이듬해 화신화랑에서 귀국 기념 개인전을 가집니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조국의 정체성을 느끼고 싶어서 돌아온 조국은 그다지 마음 편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자유당 말기의 황폐한 서울 분위기는 창작에만 몰두할 여유를 주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연, 학연으로 맺어진 화단의 반목과 질시는 고문과 다름없었습니다. 결국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서울대와의 연을 끊고 서라벌 예대, 마포고등학교 교직생활을 지내다가 야인의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온 조국이지만 화단의 장벽은 너무 높았습니다. 그 후에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비원의 아름다움에 빠지게 되었고 ‘비원파’라 불리우며 사실적인 작품에 몰두하게 됩니다.

‘비원파’ 시절의 작품은 일본에서 큰 인기였지만 표현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그 무렵 제주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한국 작가들이 하나 둘 외국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고 유럽으로 가 볼까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은 형편에 주저하고 있던 차에 ‘제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득한 유년 시절의 풍광이 떠오르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생활과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응할 수는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단 11일 동안의 미학과 예술론 특별강의를 조건으로 수양 삼아 내려오게 된 것이 1~2년이 지나게 되었고 어느덧 정년퇴임까지 하셨다고 합니다. 1986년에는 국내 최초의 시립미술관인 서귀포시 기당미술관의 설립에 기여하였으며, 2007년부터 10년 간 미국 국립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작품 2점을 한국인 최초로 전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변화백은 남은 여생을 작품활동을 하고 싶다는 소원 그대로 계속해서 제주화의 작업활동을 하다가 2013년 6월 8일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하였고, 서귀포시 사회장으로 장례가 엄수되었습니다.

제주에서 작품에만 열중해서 작업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계약을 했던 일본 화랑과도 해지가 됐고 가족과도 떨어져서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이란 늘 시간을 초월하는 명상을 요구하는 법입니다. ‘비원파’ 스타일로 제주를 묘사하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했으며 새로운 예술세계의 모색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제주를 그리려면 제주의 언어가 있어야 했다”고 말한 변화백은 “아열대 태양빛의 신선한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토빛으로 승화된다. 삼라만상, 그 현란한 색채의 유혹을 떨쳐버린 극한 상황에서 황토색과 비교한 셈이다”라며 작업을 이어갑니다.

토속적인 수묵화 기법이 가미된 ‘제주화’는 이렇게 창작되었습니다. 원시의 제주가 황토빛으로 탈색되어 수묵화적인 풍경으로 옷을 갈아입고 꾸들꾸들한 황토색 바탕의 캔버스에 구부정하게 어깨를 움추린 사내. 바람에 펄럭이는 까마귀와 소나무와 조랑말과 초가집의 풍경...

제주가 낳은 변시지의 숭고한 예술혼은 세계에 제주의 풍광을 알리고, 세계의 거장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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