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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커다란 물결, 선과 현대미술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커다란 물결, 선과 현대미술
단색화 작가 윤양호
  • 임수빈 가치창의재단 이사장
  • 승인 2020.03.1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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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양호, Zeit Geist-아는 것을 버리다, 2017, Mixed media on canvas, 250x200cm
윤양호, Zeit Geist-아는 것을 버리다, 2017, Mixed media on canvas, 250x200cm

선(禪)은 불교에서 출발한 정신 수행 방법이다. 이런 동양적인 사상에 유럽의 예술가들이 열광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선을 체험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수많은 예술가 덕에 현대미술에서 선은 필수적인 요소로 손꼽힌다. 윤양호 작가는 선과 현대미술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연구와 그만의 고유한 작품 세계를 통해 예술 작품이 가져야 할 표현 너머의 정신성을 드러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저서, 연구논문 등에서 ‘선(禪)’이라는 개념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는 당연히 작품에도 반영됐을 것 같습니다.

1949년 독일에서 탄생한 젠49(Zen49)라는 그룹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술 중에서도 정신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실 이런 내용은 1911년에 칸딘스키가 처음으로 주장했지만,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 했어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예술에서 정신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들이 인식되기 시작하며 탄생한 그룹이 젠49입니다. 그들 이후에 제로(Zero)라는 그룹도 탄생하게 되고, 백남준이 속했던 플럭서스(FLUXUS)도 생기게 됩니다. 

그 다음은 조형적인 특성입니다. 조형적 특성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내용이 어떻게 표현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조형적 특성이 추상적 표현입니다. 형상이 없어지고 상징화가 돼요. 일상의 대상은 시간과 공간,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고, 결국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관한 관심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형상이 없어지고 본질을 표현하는 추상화로 가는 것입니다. 

 

단색화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요?

대학을 졸업하고 1994년에 대학로의 한 미술관에서 그룹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때 10m가량 되는 전형적인 단색화 작품을 전시했어요. 그런데 그 작품을 전시하고는 엄청나게 혼이 났습니다. 선배들, 선생님들 할 것 없이 ‘이게 무슨 예술이냐’고 했어요. 오랜 시간 작업해서 발표한 작품이었는데 말이에요. 당시 많은 충격을 받았어요. 

농부가 씨를 뿌리려면 그 토양을 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단색화(당시에는 미니멀적 추상)라는 씨앗을 뿌리기에는 아직 한국이란 토양이 적합하지 않겠구나’라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리고 1996년에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단색화 작업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분위기였어요. 저를 뽑아준 교수님께서는 1994년 전시에서 혼났던 그 작품 때문에 저를 뽑았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죠. 그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단색화를 꾸준히 그려오고 있습니다. 30여 년 가까이요.

윤양호, Zeit Geist-아는 것을 버리다, 2016, Mixed media on canvas, 90.9x72.7cm
윤양호, Zeit Geist-아는 것을 버리다, 2016, Mixed media on canvas, 90.9x72.7cm

작품에 다른 색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주로 파란색이 등장합니다. 파란색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작품에서 파란색은 어떤 의미인가요?

제가 작품에서 사용하는 색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레드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다가 2006년부터 파란색을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고, 2013년 즈음에는 본격적인 파란색의 시대로 넘어왔어요. 피카소의 청색 시대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웃음) 

처음에 빨간색을 사용했던 건 색이 주는 강한 에너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창 학술연구를 진행하던 중 정신의 깊이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색이 파란색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파란색은 아이케이비(IKB)라고 이브 클라인이 만든 특수한 파란색이에요. 보편적, 합리적이면서 객관적인 인간의 사유 체계를 블루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파란색이 가지고 있는 의미 위에 원형이나 선이 들어가면서 상징이 되고, 이것이 저의 정신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저의 새로운 조형성이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이고, 이는 현재 진행 중입니다.

 

서양의 모노크롬화와 한국의 단색화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저는 지금껏 단순히 번역의 차이라고만 인지해 왔습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1970~1980년대 등장했던 한국의 단색화는 2012년 윤진섭 교수가 명명하며 시작됐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개념이다 보니 단색화에 대한 개념들이 정립되는 데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단색화가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획득해 세계현대미술사에 진입하리라 기대해 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단색화와 모노크롬 회화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은 대상은 사라지고 가장 본질적인 요소, 즉 정신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후 점차 회화의 기본요소인 점, 선, 면으로 변화하며 새로운 표현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이브 클라인도 모노크롬 회화를 통해 고도의 정신성을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표현하고자 했어요. 그가 색을 만들었던 이유 중 하나도 자기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을 기존의 색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차이점이라고 하면, 모노크롬 회화는 오로지 정신성,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이 있는 고도의 정신성(깨달음 또는 진리)을 추구한다는 거에요.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선문답적인 측면이 있죠. 

한국의 단색화는 정신성과 시대성을 연역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쉽게 설명하면 작가의 계산된 의도보다는 여운을 남겨둔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풀어서 보여줘요. 그래서 단색화에는 점, 선, 면이 다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모노크롬 회화와 구분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명료해지기 위해서는 연구가 더 진행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인터뷰에서 예술을 ‘수행’이라고 표현했어요. 작업하는 과정에서 반복되는 행위를 수행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그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쏟는 정신적인 노력을 수행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물론 작업하는 과정 자체가 수행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수행이 일상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경쟁 사회에서 우리는 항상 타인과 비교하면서 우위에 서려고 하지만 한계가 있죠. 그래서 절대적인 우위로 가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어요. 어린 시절의 영향도 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불교와 선 사상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련 책들을 읽고 좌선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끼게 됐어요. 특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럴 때, 의식이 바뀌면 대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작품 활동이라는 행위가 따라와요. 저는 작업하기 전 짧게라도 수행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호흡을 통해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힌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합니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경험과 선적 수행이 작품에서 결합을 통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작품에서 서구적인 현대성이 느껴지면서도, 선이나 원 하나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의미는 동양적이라고 느꼈거든요.

많은 분이 그렇게 봅니다. 유럽에 가면 제 작품을 보고 너무 동양적, 선적이라고 해요. 또 동시에 현대적이다. 이 세 가지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감상이기도 하고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현대미술이라고 하는 것은 동서양의 구분도 없고, 미학이나 표현, 미술 시장까지 모두 보편화 된 하나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어요. 요즘 작가들은 시대정신의 흐름을 면밀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연구해서 표현할 때, 예술성이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윤양호 작가. (출처: SIBKOREA)
윤양호 작가. (출처: SIBKOREA)

새 작품에 대한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나요?

미술대학에 진학하고 나니, 교수님마다 하는 얘기가 ‘창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정작 그 창의라는 것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을 해주는 분이 없었죠. 대학교 3학년 때, 해답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에 절에 들어가서 100일쯤 머물며 어렴풋이 개념을 정리해 봤어요. 

그랬더니 창의성이라는 것이 선에서의 깨달음과 맞물리더라고요.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으면 그 깨달음을 얻은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걸 과거의 방법으로 드러내면 흉내 냈다고 합니다. 분명 내가 뭔가를 얻었다면, 드러내는 방법도 새로워야 하는 거예요. 창의성은 의식의 확장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수행을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칸트의 미학을 짧게 정리하면 ‘새로운 개념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칸트가 그런 개념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꽃과 나무 등의 대상을 그리고 있었을지 몰라요. 이런 것들을 종합해 제가 찾은 결론은 창의성이란 결국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제 나름의 개념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작품으로 만들어냅니다. 표현하기에 앞서 개념을 정립하는 과정은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시대정신과 작가 개인의 정신성이 어떻게 연결돼야 한다고 보나요?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그렇게 된다면 사실 우리는 과거 시대에서 만들어 놓은 카테고리 속에서 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예술가들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시대정신을 늘 새롭게 연구하고 또 표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술가들의 사회적인 역할이에요. 

그 정신이란 개인이 본질적인 존재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정해놓은 개념들이 있었다면 지금은 개인 삶의 가치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역량을 함양시킬 수 있도록 절대 우위에 도달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하고 작가들은 그런 개인의 깊은 정신성을 작품에 드러내야 합니다.

제 작품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저는 제 작품의 특성을 늘 세 가지로 말씀드립니다. 첫째는 단순성입니다. 단순성은 가장 본질로 가는 것입니다. 본질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요? 불교 용어 중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 있습니다. 하나가 전체고 전체가 하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생각을 자꾸 정리하다 보니까 표현이 단순해져요. 제가 제목으로 쓰는 것도 ‘오직 모를 뿐’입니다. 아는 것을 다 버리고 나니 오직 모른다는 사실만이 남습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개념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반복성입니다. 반복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똑같이 반복되는 건 사실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도 반복되는 것 같지만 전부 다릅니다. 금강경에서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는 말이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조차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제 작품에서도 계속 반복되는 것은 있지만, 똑같은 건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안에 같은 것이 없고 순간들은 변화하고 인지하는 순간에 삶이 바뀝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특징이 비정형성입니다. 제가 작품에 사용하는 형과 색도 조금씩 다 다릅니다. 이렇게 되면 특징들이 모두 연결됩니다. 단순성이 반복의 과정을 거치면서 드러나는 것은 비정형성을 띕니다. 일관성이 있습니다. 

이건 제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개념이면서 동시에 조형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다른 단색화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고요. 제가 드러내고자 하는 정신성의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의 특징을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올해에는 어떤 것들을 준비하고 있는지 계획을 들려주세요.

올해가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될 것 같아요.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 다시 진출하려고 합니다. 전에는 공부하러 갔다면 이제는 작가로 가는 겁니다. 세계적인 작가들과 겨뤄보러요. 여러 가지 상황으로 봤을 때, 이제는 정말 도전해 볼 시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의 중요한 계획은 오는 5월 국제학술심포지엄 ‘선과 현대미술’을 주최해서 진행하는 것입니다. 작년 6월, 파리에서 파리8대학 교수가 기획한 것이 시작이었어요. 제가 한국 대표로 참여하고, 세계 5개국 대표들이 발표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앞으로 선과 현대미술이라는 주제가 시대적 패러다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공감을 이끈 거죠. 올해는 한국, 또 내년에는 독일, 이런 식으로 각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젠49나 제로 운동처럼 예술운동을 만들어 보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 한국 작가들이 세계로 나가는 데, 학문적, 철학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는 인식도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로도 처음에는 두 명이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함께 학술세미나를 진행하는 우리도 다섯 명이지만, 각 나라를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선과 현대미술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을 발전시켜보고자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제가 소속된 갤러리 비선재에서 전시를 합니다. 무게 중심을 한국 시장보다는 유럽으로 옮겨가는 것이 올해의 가장 큰 계획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는 거요.

 

“자신의 철학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관념이에요. 표현만 번지르르하지 근거가 없거든요. 표현이란 건 자신의 개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규정된 개념 싸움이에요.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차별화도 절대 안 돼요. 어딘가에 찾아보면 분명히 비슷한 작품들이 있어요.” 

마지막까지 그가 강조하는 것은 표현을 넘어 본질에 다가가는 예술가의 정신성이다. 단지 예술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너무나 부족한 이 시대에 윤양호 작가의 미학과 작품에 드러나는 메시지는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가 수행을 통해 창의성이라는 해답을 찾은 것처럼 우리 역시 스스로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질 수 있기를.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만들어 나가고 있는 선과 현대미술이라는 미학적 패러다임이 현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커다란 물결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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