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세계와 노동의 미래

21세기판 흑사병의 공포가 오만과 탐욕으로 도시문명을 확장해 온 인류를 덮쳤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AC(After corona) 100, 세계는 지금


오월의 아침, 금강대학교 연구실 창으로 보이는 계룡산은 싱그러운 신록으로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 그러고 보니 교직원 기숙사 성도관 앞마당의 산벚나무가 연분홍 꽃잎을 봄바람에 날려 보낸 지도 꽤 오래된 듯하다.

국내 첫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한 100여 일 전과 지금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됐다.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 강의 동영상을 제작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이 벌써 한 해의 3분의 1이 지났건만, 언제 끝날지 모를 검은 죽음의 기운은 오늘도 약한 숙주를 찾아 대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다.

21세기판 흑사병의 공포가 오만과 탐욕으로 도시 문명을 확장해 온 인류를 덮쳤다. 중국 보건당국이 ‘우한 폐렴’ 환자 발생을 세계보건기구(WHO)에 보고한 것이 지난해 12월 31일. 세계보건기구가 3월 11일 뒤늦게 ‘세계적 대유행’를 선포했지만 이미 뉴욕 등 선진 문명을 자랑하던 주요 도시들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 등장한 오랑 시를 닮아가고 있다.

힘 자랑하는 덩치 큰 수뇌들의 자국 중심주의로 균열을 보이던 국제공조는 바이러스의 제왕 코로나19의 보이지 않는 공포 앞에서 산산이 깨져 버렸다. 국제연합(UN),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이하 IMF) 등 국제기구는 무력하기 그지없고, 세계 각국은 앞다퉈 문을 걸어 잠갔다.

사람들의 이동과 접촉이 멈춤에 따라 산업의 엔진도 꺼져가고 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는 차원이 다른 말 그대로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초대형 경제위기다.

과거 두 차례는 금융위기였지만 이번에는 실물 부문이 타격을 받고 그것이 금융 등 세계경제 전 부문으로 확산된 복합위기다. 글로벌 공급망의 붕괴 위기로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충격을 받아 파장의 폭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노동시장으로, 실업의 쓰나미는 이미 시작됐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50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고, 미국의 실업수당 청구가 연일 수직 상승해 성장률 –20%, 실업률 32% 등 불과 한두 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충격적 전망이 잇따른다.

미국에서만 약 4천 700만 개의 일자리(2019년 말 우리나라 전체 취업자는 2,712만 3천 명)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증유의 공포 앞에 각국 정부는 그간 금기시했던 정책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헬리콥터로 천문학적 돈 뿌리기, 군경을 동원한 방역, 국방물자생산법 등 총력전 체제다. 정치가 통치로 대체되고 시민의 자유는 국가권력 앞에서 왜소해지지만 세계적 대유행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개개인은 정부의 대책에 온 신경을 곧추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뒤질세라 대한민국 정부도 나섰다.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보다 사망자가 적어 방역의 모범을 세웠다는 자부의 깃발을 올리고, 11조 7천억 원의 1차 추경, 100조 원의 금융안정 패키지, 한국형 양적 완화, 긴급재난지원금 등 긴급 처방이 이어졌다.

그러나 시중에서는 도대체 정부가 발표한 대책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아우성이다. 설익은 정책 발표로 공무원들이 집행계획을 짜는 사이, 공장과 가게 문은 닫히고 일자리를 잃은 소상공인과 민초들은 소상공인진흥공단과 실업급여 교육장을 찾는다.

하지만 사정이 더 절박해도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한 ‘특수한’ 노동자에게 은행이나 고용센터는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성벽이다. 4인 가족에 100만 원은 ‘고비사막에 한 주전자 물 붓기’, 이마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뒤에는 또 어찌할 것인가? 이렇게 한국사회의 기층부터 허리까지 무너져가는 사이에도 계절의 여왕 5월은 화려한 장미꽃을 피워 고달픈 서민들의 삶을 처연하게 만든다.

하지만 희망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절망과 마주해서도 끝내 희망의 의지를 잃지 않고 일어섰던 오랑의 시민들처럼 대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은 소리 없이 그러나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견디며 인간승리의 새 역사를 만들고 있다.


코로나 19와 노동 현장


정부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생존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기업과 시민들은 ‘기민하고(agile)’, ‘스마트(smart)’하게 위기 대응에 나서고, 노동시장은 근본적인 전환기에 들어섰다. 우선 일하는 방식의 혁신과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 맞춰 시작된 비대면 재택근무와 분산근무 등 유연근로 확산에 이어 줌, 행아웃, 팀스 등 영상회의 솔루션 사용이 일반화되고 전사적인 스마트워크로 진화하고 있다. 정보기술(IT)을 활용한 공간적 한계의 극복과 시간의 유연한 사용으로 일하는 방식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

호봉제 임금체계, 과반수 동의 조건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 노조 가입을 강제하는 유니온숍, 교섭 강제와 부당노동행위 처벌제도 등 20세기형 노동체제의 점유율은 급속히 추락하고, 주 52시간을 위반하면 처벌한다는 식의 전근대적 규제는 이미 규범력을 상실했다.

둘째, 직업윤리의 가치, 사회적 책임과 연대의 재발견은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 되고 있다. ‘재난 유토피아’ 개념을 제시한 리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가 이야기하는 이타적 인간의 배려와 연대, 헌신적 사랑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구를 비롯해 바이러스와의 전쟁 최일선에서 싸우는 의료인과 공직자, 자원봉사자, 생산•물류•배달 현장 노동자들의 헌신, 특히 성숙한 시민의식에 대한 해외의 찬사가 쏟아진다. 기업들도 사회적 책임경영이 무엇인지 잘 보여줬다.

그럼에도 초기방역 실패로 경제 시스템 전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면서 도산•실업의 공포가 현실화되고 있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라지자 경제의 셧다운이 소비에서 생산으로, 실물에서 금융으로, 국가에서 국가로 퍼져 나가는 파국의 도미노, 더이상 안전한 곳은 없지만 재앙은 야속하게도 약한 곳부터 친다.

비정규직, 자영업자, 소상공인, 중소기업 순으로 무너지고, 대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폐업과 감원은 피해 보려 하지만 더 버틸 여력이 없다. 실업의 쓰나미가 사회안전망의 방파제를 무너뜨려도 정책 오류와 포퓰리즘 정치에 따른 재정 소진으로 정책수단도 한계 상태에 이르렀으며 시장실패와 정부실패를 넘어 국가실패의 위기 상황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일하는 방식과 전근대적인 노동규제를 혁신해야 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국가적 위기대응체제로 전환해야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 개발 못지않게 경제 시스템 치료도 시급하다. 석학들은 사회 인프라 투자, 대규모 유동성 공급, 정부의 지급보증 등 다양한 처방전을 제시하고,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은 3월 26일 화상회의에서 생명보호, 일자리•소득 지키기, 금융 안정성 보존 및 성장세 회복, 무역 및 글로벌 공급체인 붕괴 최소화를 공동과제로 설정했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는 지난 몇 년간 기저 질환을 앓아온 상태에서 코로나19의 충격으로 숨넘어가기 직전이다. 비상한 국가적 대응체제를 갖추고, 위기 대응의 중심축을 명료하게 설정한 뒤, 집중적으로 속도전을 전개해야만 한다.

최우선의 과제는 기업 도산을 막고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다. 노동시장이 유연한 미국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실업률 상승기간보다 회복기간이 2.8배 길었다. 경직적인 우리 노동시장의 경우 한번 떨어져 나간 일자리를 회복할 가능성은 더욱 낮고, 고비용 규제, 정치적 불확실성, 디지털 전환, 감염병 등 사람을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할 이유는 수두룩하다. 돈줄이 막힌 기업부터 살리고, 무급휴직자 소득지원 등 고용보험제도를 과감하게 개편해야 한다.

생계지원과 소득보장 제도를 확충해야 한다. 당장은 일거리가 없어 생계위협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긴급지원이 급선무지만 긴급지원금은 임시방편일 뿐 근본대책이 될 수 없다. 기축통화국이 아니라 양적 완화를 장기간 지속하기도 어렵고, 재정 여력도 소진돼 한계가 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기본소득의 재원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고용보험을 확충한 것과 같이 이번에 한국형 실업부조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하루빨리 국회에 제출된 국민취업지원제도를 수정•보완해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최소한의 피난처를 마련해줘야 한다. 아울러 체불근로자의 미불임금 전액을 선지급하고 사업주에게 경제적 제재와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임금채권보장제도를 혁신할 필요가 있다.

차제에 일하는 방식과 전근대적인 노동규제를 혁신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될 변종 바이러스의 침투에 무력하게 당하고 말 것이다. 그간 보여준 정부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정치권의 리더십으로는 개혁의 시작조차 기대하기 어렵고, 결국 대통령의 결단과 리더십이 불가피하다.

여야대립을 끝내고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는 거국내각과 사회적 합의, 그리고 비상한 개혁조치를 담은 긴급재정명령이 필요하다. 평시체제로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청와대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정부가 돼야 하고, 경제부총리는 부대의견이 아니라 경제정책을 지휘할 수 있는 자가 돼야 하며, 장관들은 노사의 고통 분담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의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니 새날을 맞이할 등불을 켜고 깨어 있어야 하겠다.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은 불멸의 영웅 베토벤은 그가 남긴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오라 희망이여, 당신의 반짝이는 빛이 사라지지 않게 해주오.


임무송 금강대학교 공공정책학부 교수

임무송 금강대학교 공공정책학부 교수

1988년 제32회 행정고시 출신으로, 서울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조정담당), 경기지역인적자원개발위원회 선임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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