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복잡할 땐 집과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자

도시 곳곳에 새겨진 문구에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도시는 늘 바쁘다.
오가는 사람도 많고 차들도 많다.
늘 분주히 움직이며 저마다의 길을 간다.
화난 것처럼 웃음기 없는
냉담하고 시무룩한 도시인의 얼굴은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도시가 늘 그런 것만은 아니다.
단지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 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칠 뿐.

 


삶의 위안을 주는 고마운 글판


서울 한복판에는 지난 30여 년간 시민에게 위안을 주고 사랑을 받고 있는 고마운 존재가 있는데, 광화문 교보빌딩 글판이 바로 그것이다. 일상에 지친 도시민을 위로하고 격려해 준 교보빌딩 글판은 예전부터 서울 광화문의 명물로 통한다. 지난 3월 초부터 선보이고 있는 천양희 시인의 ‘너에게 쓴다’의 아름다운 글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19) 사태로 우울하고 휑해진 도심의 서울시민을 위로해 주고 있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 너에게 쓰고 /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 너에게 쓴다”

아름다운 꽃이 진 곳에 새 생명이 자라는 자연의 순리를 표현했다. 지난 것에 대한 아쉬움 보다는 내일의 희망을 기대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글귀다. 그동안 시민들에게 사랑받은 글귀 몇 가지를 떠올려보자.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
살았다는 흔적은 / 별처럼 아름답다”
- 이생진 시인 ‘벌레먹은 나뭇잎’ 中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 나태주 시인 ‘불꽃’ 中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 시인 ‘방문객’ 中
“저게 저절로 붉어질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장석주 시인 ‘대추 한 알’ 中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 이성부 시인 ‘봄’ 中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이준관 시인 ‘구부러진 길’ 中

 

교보빌딩 글판은 가로 20m, 세로 8m의 대형 크기로, 지난 1991년 탄생해 벌써 서른 살이 됐다. 시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자는 교보생명 창립자의 제안으로 시작됐지만, 초기에는 다소 직설적이고 기업 홍보적인 성격을 많이 띠었다.

감성적인 메시지로의 변화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시민에게 위안을 주자는 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면서 이듬해부터는 좋은 시나 글귀가 등장하게 됐다. 지난 2000년부터는 글귀를 선정하는 위원회가 구성되고 본격적으로 시민들의 참여와 투표도 진행되며 명실공히 ‘시민을 위한 시민의 글판’으로 자리 잡으며 이제 광화문 글판은 도심의 명물이 됐다.

도시의 원고지에 작품을 남길 수 있는 대상은 도시에 사는 시민들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바쁜 일상, 함께 공감하는 지하철역 짧은 시


지하철역과 지하철 차량 객실은 도시민의 삶과 정서가 한껏 배어있는 곳이다. 무수한 상품 브랜드 광고, 아파트 분양 광고, 관청에서 게시하는 공익 캠페인, 지역 홍보 광고, 축제 홍보 등 오가는 이들의 관심을 끌고자 경쟁이 치열하다.

출근길 이른 아침엔 동시에 쏟아지는 승객으로 인해 분주한 터라 눈길을 줄 겨를도 없지만 퇴근길에는 다소 넉넉한 마음으로 각종 다양한 글귀와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는 비교적 짧고 소박한 시들이 많은 시민들에게 작은 감동의 여운을 안겨준다.

 

“삐뚤삐뚤 / 날면서도 / 꽃송이 찾아오는 /
나비를 보아라 / 마음아”
- 함민복 시인의 ‘나를 위로하며’ 中

“하루 종일 / 넥타이에 매여 끌려 다니다가 /
그림자 밟고 / 집으로 오는 길 / 골목길 돌고 돌아 /
쪽대문 밀치고 들어 서면 / 크고 작은 종이 몇 송이 /
소박한 저녁상 차려 놓고 / 피워내는 하얀 웃음 /
내 얼굴도 / 갓 떠오른 저녁달만큼 / 환해진다.”
- 윤주영(시민 공모작)의 ‘퇴근 길’ 中

 

지하철 스크린도어의 글귀는 초기에는 유명 시인의 대표적인 시나 유명인의 명언을 담았지만 몇 해 전부터는 일반 시민의 참여가 활발해지고 있다. 위에서 소개한 시 ‘퇴근길’도 일반 시민의 공모 작품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세상에서 가장 큰 시집’이라 불리는 지하철 게시용 ‘시민 창작 시’ 200편을 공모했다. 공모전을 통해 선정된 시는 지하철 1~9호선, 분당선 총 299개 역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게시됐다. 시를 좋아하는 필자도 내년에는 시민 공모전에 한번 참여해볼 생각이다. 정성 들여 지어낸 시와 글귀가 지하철역 한 켠에서 시민들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다면?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청년 세대의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들이 빛을 발하고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정치 문구도 삶의 일부


뜨거웠던 지난 총선에도 전국 도시 각 동네 목 좋은 거리마다 각 정당의 선거 후보가 내세운 다양한 현수막이 유권자의 시선을 끌었다.

 

“어려운 경제, 주민 여러분 힘내십시오.
우리 OO당이 있습니다.”

“거침없이 퍼 쓰는 예산, 대한민국 거덜납니다.”

“어르신들이 보는 가짜뉴스로 대한민국 청년의 미래가 죽어갑니다!”

 

문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역 주민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글도 있고 상대 정당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글, 정책 성과를 자화자찬 하는 현수막도 보인다. 동네마다 제각각 걸려있는 현수막의 내용만 보더라도 지역 현안이 무엇인지, 애로사항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다운 글귀는코로나19 사태로 우울하고 휑해진 도심의서울시민을 위로해 준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재미(위트)있는 글귀를 보면 힐링이 된다


도시의 각 거리, 동네마다 무수히 많은 가게들이 있지만 독특한 상호와 간판을 걸어놓고 치열한 전쟁을 펼치는 가게, 상점들이 있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색다름을 주고 심지어 재미까지 선사한다. 이 정도면 이 가게 단골이 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가게 주인장들이 수준급 카피라이터인 듯하다.

 

- 식당: ‘밥집이라기엔 쑥스럽고 술집이라기엔 좀 그렇고’

- 돼지고깃집: ‘저8계 콧9멍’

- 고깃집: '인생 뭐 있어 고기서 고기지’

- 치킨집: ‘닭큐멘타리’, ‘닭치거라’

- 횟집: ‘저 오늘 우럭 못 썰면 집에 못 들어갑니다’

- PC방: ‘인터넷 끊겨 내가 차린 PC방’

- 미용실: ‘머리 잘 못하는 집’, ‘머리에 무슨 일이 생길까’

 옷집: ‘그 꼴로 어디 가게?’

 

간판도 재밌지만 점포 내부의 벽면에 써 붙인 안내 문구나 종업원 유니폼(티셔츠)에 새겨진 글귀도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재치있는 명구들이 많이 있다. 판매를 적극 권유하면서도 전혀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고급 위트가 녹아 있다.

요즘 창업 전선에 뛰어든 젊은 청춘 세대들이 많은 만큼 녹슬지 않은 이들의 재기 발랄하고 발칙하고 과감한 아이디어들이 돋보인다. 인생 하루하루가 카피의 연속이고 삶은 영원한 이야기 소재가 된다.

 

“지나친 음주는 감사합니다”

“지금은 1인 1닭 시대”

“외상은 어림없지~”

“살다 보니 인맥보단 치맥이더라”

“단골손님이 너였으면 좋겠다”

“어서 와~저번에도 왔었지”

“99세 이상 흡연 가능”

“당신의 뱃살은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토닥토닥이 아닌 통닭통닭으로 나를 위로하네”

 

도시민이여. 머리가 복잡할 땐 집과 사무실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 보라. 나가 보면 거리에서, 시장에서, 지하철역에서 공원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안식처들이 등장한다. 잠시 한순간이지만 삶을 위로받고 마음속으로 통하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

도시는 삶을 이야기하는 무한한 원고지다. 도시 여기저기에 아직 여백이 많음은 누군가가 채워주리라는 기대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원고지에 작품을 남길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우리 도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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