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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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경쟁력을 훼손하는 적대적 노사관계

노사협력 순위 145개국 중 119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적대적인 노사관계로 국가경쟁력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한국 노사관계의 현주소이다. 올해 1월 22일, 다보스 포럼에서 발표된 `세계 인적자원 경쟁력 지수(The Global Talent Competitiveness Index·GTCI) 2020`에서 우리나라 노사관계에 대한 평가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밑바닥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적대적 노사관계가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경고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 기치를 내건 김영삼 정부 이래 역대 정권마다 노동개혁을 추진했지만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뒷걸음치고 있는 형국이다.

권력이 된 노조, 그러한 노조를 경원시하는 사용자. 도대체 한국 노사관계는 어쩌다가 대립과 갈등의 대명사가 된 것일까?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지만 핵심 요인의 하나가 ‘관치형 노사관계’이다. “아니, 관치금융은 들어 봤지만 노사관계에 ‘관치’라니, 노조 권력이 막강해서 청와대 정부도 눈치를 보지 않는가” 의문을 가지는 이도 있을 것이다.

관치의 반대말은 자치. 그렇다.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에 비해서도 넘쳐나는 것은 적대감이요 모자라는 것은 노사자치이다. 자치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며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자율과 책임을 의미한다. 참여와 협력은 자치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한국 노사는 정부의 선택적 편향성에 의존하면서 자치 역량을 상실하고 파트너를 적대시하는 구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당연히 노사가 알아서 할 일을 한국에서는 국가가 시시콜콜 개입하면서 노사는 서로 싸우기만 할 뿐 자기 규율도 안하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관치형 노사관계, 그 실태와 문제점은 무엇인가?

기업인을 처벌하는 규정만 수천 개. 민주화 이후 선거를 거듭할수록 행정적, 형사적, 민사적 제재에 징벌적 손해배상까지 기업활동에 대한 규제와 처벌이 날로 강화되고 있다. 기업의 대응책을 묻는 설문에 본사 해외 탈출까지 등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이 생길 때마다 피해자나 가해자의 이름을 딴 법률안 발의가 유행처럼 번지는데, 그때마다 꼭 따라붙는 것이 형벌조항이다. 가히 ‘처벌 만능주의’, ‘형벌중독사회’라 할 만하다. 공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권이 나날이 커지는 이유이다.

공정과 약자 보호를 앞세운 국가의 개입은 노동의 영역에서 더욱 직접적이다. 채용부터 배치전환, 임금, 노동시간, 복지, 해고에 이르기까지 노동관계 모든 영역에 걸쳐 획일적 규제가 촘촘하다. 노사 모두의 자유가 제약된다. 대표적인 예가 노동시간과 통상임금이다.

A사에 전체 직원의 90%가 조합원으로 가입한 노동조합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노사는 오랫동안 원만하게 지내면서 임금교섭에서 이런저런 수당과 상여금을 늘리는 대신 일감이 많을 때는 연장근로와 휴일 특근을 하고, 연장근로수당의 기준이 되는 통상임금항목은 노사합의로 정해서 운영하여 왔다.

그런데 어느 날 불만을 가진 일부 직원이 제2노조를 설립하고, 통상임금과 휴일연장근로 가산 수당을 적게 받았다며 소송을 제기하자 상황은 급변한다. 두 노조는 서로 많이 받아주겠다고 경쟁하며, 사용자가 임의로 통상임금을 작게 조작하였다고 공격한다.

회사 실정을 가장 잘 아는 노사 당사자가 아무리 원해도 노사합의는 부정되고, 어떤 항목의 금품이 통상임금에 들어가는지는 판사가 결정한다. 참고로 임금체불과 노동시간 위반은 형사처벌 대상이다. 노조 간 세력다툼은 치열해지고 노사 평화는 산산조각난다.

자치의 부정은 사용자 규제에 그치지 않는다. 노동3권의 영역에도 국가는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다. 노동조합을 설립하려면 사실상의 실질심사를 통과해야 하며, 노동조합이라는 명칭을 함부로 쓰면 처벌받는다.

노조 임원의 임기는 3년을 넘길 수 없고, 단체협약의 유효기간도 제한된다. 노조 규약과 단체협약은 행정관청의 심사 및 시정명령 대상이다. 사용자는 노동조합의 교섭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처벌된다.

파업 시 조업을 계속하기 위해 외부 대체인력 투입이나 도급 사용은 파업 참여자의 50%까지만 허용되는 필수공익사업을 제외하고는 금지된다. 전국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시대에도 해고 통보를 서면으로 하지 않으면 위법무효이다. 일주일에 하루는 일하지 않아도 임금을 주지 않으면 처벌받는다.

국가주도성은 사회적 대화와 합의에서도 여지없다. 경제위기 때 정부가 지원책을 제시하며 노사의 고통분담을 설득하는 것은 서구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정부가 협상을 주도하는 우리나라에서 노사가 합의해야 할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답정너’! 동원된 관제합의에 불참하고 정해진 모범답안을 거부하는 것은 기득권 귀족 노조의 집단이기주의로 매도되기 십상이다. 일부 노조의 무책임한 행태와 리더십 결여도 문제지만 노사를 사회적 대화의 주체로 존중하지 않는 인식, 정부의 압박에 취약한 사용자단체의 참여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행태, 갈채와 스포트라이트가 꺼지면 이내 잊혀지고 말았던 수많은 노사정 합의에 얽힌 슬픈 서사의 배경이다.

 

격변의 4차 산업혁명 시대, 정부보다 노사가 현장을 더 잘 안다

국제기준에 비해 높은 수준의 노동조건을 획일적으로 강제하면서 노동운동과 자치를 억압하는 노동정책은 수출주도 경제성장과 산업화 시대의 대량생산체제에는 적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경제환경, 산업구조, 노동력 구성과 기술이 급변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다품종 소량생산, 환경변화에 대한 기민한 대응이 경쟁력의 필수요소가 된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세계 각국은 일하는 방식의 혁신을 앞다퉈 추진한다.

그렇다면 기민한 적응력과 창의적 혁신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산업활동이 이루어지는 노동현장이고, 현장의 주인공은 노사 당사자이다. 공상영화에서나 보던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현실화되고, 세상은 상전벽해로 더욱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정부가 표준화된 하나의 잣대로 규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실체적 규제를 자제하고, 현실 문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노사 당사자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규율하고 풀어갈 수 있도록 공정하고 합리적인 구조와 절차를 만들고 관리하는데 충실하라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기준이나 조치가 고용상 차별인지 여부를 사전에 실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그러한 기준을 노사가 대등한 교섭구조와 협의절차에 의해 마련하였다면 일응 합리적인 것으로 추정하자는 것이다.

 

COVID 파시즘으로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

권위주의 군사정권하에서는 정부주도 경제개발과 수출주도 성장전략을 뒷받침하는 종속적 존재로서의 노사관계와 억압적 노동정책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 결과 참여와 협력의 노사 자치는 설 자리가 없어지고, 경제성장에 따른 모순의 축적과 억압에 대한 투쟁으로 형성된 불신과 대립, 갈등의 노사관계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1987년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폭발, 1998년 대량실업의 고통을 안겨준 IMF 외환위기,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2017년 대통령 탄핵과 자칭 ‘촛불정부’의 출범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위기와 격변기를 겪었지만 우리는 자율과 책임, 참여와 협력의 합리적인 노동체제 구축에 실패하였다. 자원의 독점과 규제적 개입이라는 의미에서의 국가주도성은 여전한 가운데 일터의 균열과 국론 분열은 더욱 심해지고, 노사관계의 펀더멘털이 흔들리면서 투자와 고용은 위축되고 있다.

한신대학교 윤평중 교수는 2020년 9월 한 칼럼에서 COVID19의 창궐 속에 전염병을 다루는 생체권력이 반자유주의적 일당 독재로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을 훼손하는 것을 ‘코로나 파시즘’이라고 일갈하며 ‘시민의 자유에 대한 국가 개입의 정당한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라는 물음을 제기하였다.

시장경제체제에서 ‘소유’가 곧 ‘자유’이고, 자유는 ‘권력’이 된 시대, 집권 3년 반 만에 주택가격이 두 배 가까이 오른 나라에서 최저임금 1만 원과 노동조합의 임금인상투쟁은 어떤 실효적 의미를 가질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빼앗긴 청년들은 동학개미가 되고, 기성세대 노동조합은 고용보장 투쟁에 집중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투쟁의 대상은 고용주가 아니라 정부와 국책은행이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이라도 고용 충격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조정은 나쁜 것이라며 정부와 정치권이 대마불사의 보증인을 자처할 때 노사관계는 이내 노정관계(勞政關係)로 변질된다.

정부, 정당, 언론, 어용 단체 등 확장된 국가를 지배하는 특정 진영이 헤게모니를 굳히고 포퓰리즘을 정의라고 우기며 목청을 높이면 시민 개개인은 물론 노사도 자유의 억압과 자치의 퇴행에 익숙해지고,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정부만 쳐다보게 된다.

정권에 따라 경제발전과 노동존중을 내세운 선택적 편들기는 노사 주도의 사회적 합의를 어렵게 만든다. 정부가 어느 한 쪽 편을 들면 다른 쪽은 반발하기 마련이다. 노사간 관계와 자치의 실종이다.

지금 사회적 대화의 파트너로서 얼굴을 맞대야 할 노총과 경총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보라. 원인보다 결과 책임만 이중 삼중으로 추궁하는 노동재해 처벌, 경제와 고용 충격은 아랑곳하지 않는 노동시간 단축과 휴일 늘리기, 시민의 입을 막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억압 등 과잉 입법의 폭주에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숨 소리가 커지고 있다.

 

자율과 책임의 합리적 노사관계를 위한 과제

2020년 12월 9일,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조합법 개정안 등 7개 노동 관련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해고자와 실업자를 비롯하여 5급 이상 고위 공무원과 소방대원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고, 노조 전임자에 대한 급여 금지 규정은 삭제되었다. 경영계가 요구한 생산시설 쟁의 금지, 대체근로 허용 및 노조의 부당노동행위 규제는 반영되지 않았다.

정부는 "노사 양측의 입장을 균형 있게 반영했다"고 자평하지만 노동계에 치우친 내용으로 평가된다. 무엇보다도 노사관계와 노동시장에 대한 비전과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된 토론이나 공청회도 거치지 않아 절차적 정의를 무시하는 행태가 반복된 것도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디지털 대전환과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노사관계 입법을 졸속으로 진행한 것은 잘못이다. 그 후유증은 사회적 약자들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무역제재 공포를 조장하며 국정과제 이행에 집착하기 전에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답했어야 한다. 국가는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노동자의 대표와 교섭의 주체는 노동조합이어야만 하는가? 노동조합설립신고제도는 유지되어야 하는가?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는 누가 대표할 것인가? 임금인상 파업은 합법이고, 정리해고 반대파업은 불법이어야 하는가? 단체교섭은 강제되고, 부당노동행위 규제는 사용자에 대해서만 적용해야 하는가? 양극화를 확대하는 기업별 노사관계 체제를 계속 가지고 갈 것인가? 그러나 사회적 대화와 공감을 결여한 입법이 강행되었다. 오만과 독선으로 자유와 자치를 억압하는 국가조합주의의 서막을 알리는 듯하여 염려스럽다.

4차 산업혁명, 디지털 시대의 노사관계 기본원리는 국가에 의한 관치가 아니라 노동계약, 노사협의, 단체교섭에 의한 노사 자치가 되어야 한다. 이는 곧 민주공화국의 시민의 노동주권을 보장하는 것이고, 실종된 기업가정신과 근로윤리를 되살려 청년들의 미래 희망을 키우는 것이다.

분열과 공포가 만연하면 사람들은 동굴로 숨어들고 거리는 적막해진다. 이제라도 우리는 전체주의적 리바이어던(Leviathan)에 족쇄를 채우고, 국가와 사회가 서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애쓰모글루와 로빈슨, 『좁은 회랑』). 그 출발은 개인의 자유와 노사의 자치를 확대하는 것이다.

 

*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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