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곤, 에시하 발롬피에 구단주
축구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눈부시길

구단주가 되고 싶은 20대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스페인어를 전공했기에 현대자동차 해외영업부에서 중남미지역을 담당했지만, 가슴과 머릿속은 여전히 축구로 가득 차 있던 청년은 구단주로서의 꿈을 노트 한 권에 시뮬레이션했다. 만 5년. 회사를 나와 향한 곳은 스페인이었다. 2012년,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미터즈(Metrz)라는 스포츠 매니지먼트사를 설립했고, 같은 해 11월 마드리드에 위치한 IE비즈니스스쿨에서 MBA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구단주가 되는 것이었고 그의 눈에 들어온 축구팀이 바로 에시하 발롬피에(Ecija Balompie)였다. 구단주를 꿈꾸며 스페인에 도착한 그는 불과 4년 만인 2016년 10월 에시하 발롬피에 구단의 지분 96%를 인수하며 구단주이자 단장이 됐다. 

2017년 6월 4부 리그에서 3부 리그로 승격되던 날의 박영곤 구단주
2017년 6월 4부 리그에서 3부 리그로 승격되던 날의 박영곤 구단주

Principio 1
시작, 개시, 처음

스페인 IE비즈니스스쿨에 입학하기 전부터 박영곤 에시하 발롬피에 구단주의 가슴 속에는 ‘축구’라는 한 단어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단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설립한 미터즈는 그가 구단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 미터즈를 창업한 박 구단주는 축구 시장을 타깃으로 선수 에이전트, 스포츠 마케팅, 스포츠 TV 중계권 등의 콘텐츠 사업을 펼쳤다. 

“20대 초부터 항상 축구만 생각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구단주가 목표였죠. 손에 쥔 노트에 축구 전략들이 가득 찰 만큼 몰두했습니다. 구단 운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 저는 이 노트를 통해 구단주로서의 역량을 항상 시뮬레이션했던 것 같습니다.”

꿈은 꿨지만 구단주로서의 시작은 낯섦 자체였다. 아니, 낯섦보다는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동양의 젊은이가 에시하를 인수한다는 소식은 안달루시아 지역 언론과 주민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다른 일각에서는 “그냥 돈 많은 동양인의 장삿속”이라는 우려의 시선이 존재했다면, 다른 일각에서는 구단 80년 역사 속에서 동양인 선수가 뛴 적도 없었고 동양인 구단주나 단장이 부임했던 적도 없었기에 기대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어쨌든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시작한 구단주로서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그는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언론 플레이나 공개적인 행사에 참석하는 전략보다는 선수, 감독, 도시 관계자, 언론 등과의 1 대 1 미팅을 통해 네트워크를 확장해 나갔다. 이는 구단주로서 대내외적으로 친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해 구단 운영에 대한 격려와 지원 프로세스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구단 내부 측면에서는 파행으로 치달았던 구단 운영을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제가 부임하기 전, 7~8년간 구단 운영은 파행적이었습니다. 구단주가 에이전시와 결탁해 돈을 받고 에이전시에 소속된 선수를 경기에 출장시키는 등 전형적으로 구단을 망하게 하는 행위들이 지속되어 왔던 것이죠. 한때 2부 리그까지 올라갔던 팀이 3부 리그를 거쳐 4부 리그까지 강등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구단은 재무와 행정적인 문제가 쌓여만 갔다. 인수 당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단 2명이었다. 급여를 지급하지 않으니 모두 떠났고, 구단을 운영할 인력이 부족하니 성적 역시 형편없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지속되는 최악의 시간 속에서 팬들은 실망의 나날을 보냈고, 구단은 철저히 그들을 외면했다. 재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채를 파악하고, 채무상환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오롯이 박 구단주의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은행 거래가 정지될 정도였습니다. 과거 팀에서 뛰던 선수에 관한 법률적 문제 등 하나하나 풀어가야 할 엉킨 실타래와 같은 구단이었습니다. 지금은 행정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직원도 늘리고 업무 범위도 늘려 더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Principio 2 
근원, 근본, 원인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겠지만, 돈 보다도 팀의 근원은 응원과 격려, 질책을 아끼지 않는 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에시하 팀을 응원해줬던 팬들, 파행운영으로 등을 돌린 팬들을 다시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팀을 체계화하고 마케팅의 다양성 확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에시하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에 전면 유리로 내부가 휜히 보이는 팬숍(Fan Shop)을 열고 굿즈(Goods)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본격화했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품 행사는 물론이고, 경기 후 매점에 팬들을 초청해 함께 식사하는 자리도 가졌다. 도시 특성 상 어린이들이 많은 점을 활용해 이동식 놀이기구도 설치했다. 박 구단주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경기장을 단순한 축구관람만이 아닌 지역 사회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지역의 장애인단체와도 왕성하게 교류하며 구단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4부 리그에서 3부 리그로의 승격이 결정되는 플레이오프는 방송에서 중계를 해줄 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총 6번의 경기를 치르게 되는데, 이는 곧 스폰서십 기회를 6번 갖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돈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간 잃어버린 팀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게 관건이라고 판단해, 비영리단체인 ‘세계의 의사들’의 로고를 유니폼에 부착했습니다. 사회공헌적인 노력은 많은 분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고, 팬층을 두텁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의 근원은 선수양성이다. 1부 리그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나 FC 바르셀로나의 경우 운영비가 넘쳐나기 때문에 유소년 팀 운영에 대한 자금적 압박이 없거나 덜하겠지만, 에시하처럼 운영비의 효과적인 사용이 매우 중요한 구단에게 유소년 팀은 현실과 미래를 두고 언제나 고민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박 구단주의 선택은 미래였다. 현재 에시하에는 7개의 유소년 팀이 있다. 원래 6개 팀이었지만, 박 구단주는 취임 후 하나의 팀을 추가했다. 스페인의 유소년 팀은 연령대를 기준으로 3가지로 분류되는데, 에시하는 각 분류당 2개의 팀을 운영하는 상태에서 하나의 팀을 추가한 것이다. 그리고 유소년 팀을 책임질 총괄이사를 카탈루냐까지 찾아가 영입해 왔다. 

“순전히 미래를 위한 투자비용입니다. 하지만 결국 구단을 살리는 길은 유소년에 있다고 봅니다. 그들이 미래의 에시하를 만들고 스페인 축구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죠. 저는 기회가 된다면 해외에서도 좋은 유소년 선수를 발굴해 영입하고 싶지만, 피파 규정 (18세 미만의 청소년은 공식 경기에 참가할 수 없다) 때문에 고민입니다. 다만 기존의 구단주들처럼 마케팅이나 자금 확보를 위한 선수 영입은 하지 않을 겁니다.”

 

Principio 3
원리, 원칙, 신조, 주의

박영곤 구단주는 구단 운영 철학을 묻는 질문에 ‘누구나 공유 가능한 비전(Vision)’과 ‘에시하만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꼽았다. 

“대부분의 축구 클럽들이 중장기 계획을 세우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는 하부 리그로 갈수록 더 심해지죠. 구단 운영은 오래 전부터 꿈꿔온 일이기 때문에 오래 이 일을 하려면 철학, 비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선수, 사무실 직원, 관리 직원 등을 포함해 약 200여 명의 구성원이 함께 하고 있데,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철학이 뿌리내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박 구단주의 철학은 의외로 단순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가져간다’는 것과 ‘최고의 효율적인 구단’이 되는 것이다.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했기에 그는 전문성이 결여된 구단의 모습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지는 지 잘 이해하고 있다. 그만큼 책임감은 무거워지고, 더 나은 구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이끌어내려면 확실한 대가가 보장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박 구단주가 구성원에게 바라는 한 가지는 바로 ‘프로 정신’이다. 어느 누구도 빠지지 않고 각자의 분야에서 프로로 성장한다면, 축구팀으로서의 궁극적인 목표인 승리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다. 

“최소 10년 뒤에는 라리가에서 ‘에시하 발롬피에’라는 이름을 들었으면 합니다. 그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겠지만, 저는 에시하가 축구 구단 중 최고의 효율적인 운영방법을 지닌 구단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영화 ‘머니볼’의 배경이었던 미국 메이저리그 팀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처럼 말입니다. 이는 곧 차별화된 아이덴티티를 가지길 바란다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지는 세월이 흐른 뒤 알 수 있겠지만, 사람들이 그 ‘무엇’을 생각할 때 반드시 ‘에시하 발롬피에’를 떠올렸으면 좋겠습니다.”

스페인 리그에서는 SD 에이바르(SD Eibar)가 롤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이바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을 연고지로 두고 있는 팀으로, 작은 인구, 작은 경기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리가 무대에서 안정적으로 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4부 리그에서 3부 리그로 승격되던 날
4부 리그에서 3부 리그로 승격되던 날

2017~2018 시즌 3부 리그가 반 정도 지났다. 1월에는 이적 시장이 열려 선수 영입에 집중해야 한다. 남은 5개월간 박 구단주는 최고의 효율을 이룰 수 있는 기술이사를 영입한다는 목표 하에 움직일 계획이다. 이 목표를 위해 이미 박 구단주는 구단 내에 DNA를 심는 일을 시작했다. 사무실 직원을 다양화(한국인, 영국인 등)했고, 유소년 팀에 투자를 단행했으며, 다양한 기관 및 지역 단체와의 교류를 활성화하고 있다. 

현재(2017년 12월 8일 기준) 에시하의 순위는 3부 리그 11위이지만 1위와는 승점 6점(2 경기)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즉 반등의 여지는 존재하고 있다. 만약 이번 리그에서 2부 리그 승격이 결정된다면, 에시하는 라리가와 2부 리그에게만 주어지는 TV 중계료를 배당받을 수 있게 된다. 중계권 수익은 성적과 인기에 따라 차등 배분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2부 리그 소속팀들도 중계권 수익 총액 중 10%를 배분받아 도전의 이유는 더욱 명확해졌다. 이는 에시하가 자금 압박 없이 구단 운영이 가능해진다는 의미일 것이고, 또 에시하가 스폰서십을 통해 마케팅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팀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저는 구단주로서의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구단이 성장할수록 인프라 확장 및 다양한 분야로의 투자가 필요합니다. 에시하가 2부 리그로 승격이 된다면, 안정적인 구단운영은 물론이고 마케팅 효과도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충분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저희 에시하 발롬피에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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