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은 역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중반을 정점으로 근대기 전후로 나뉜다. 물론 이러한 변곡점은 유럽 산업화 혁명과 무관하지 않다. 산업화는 기계화에 따른 기술문명의 발달과 대량생산뿐만 아니라 농업경제에서 산업경제를 따라 인구이동, 도시화를 이루었고 이를 통해 대중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회변혁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상류층은 여전히 고전주의식 사상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상주의 미술은 고전주의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당대 젊은 작가들의 의지에서 탄생했다. 요즘 사람들은 고전주의와 인상주의 간의 큰 차이를 인지하지 못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쉽게 설명하자면 고전주의는 작가가 알고 경험한 세계를 그리지 않고 이미 의미와 가치가 설정된 양식화된 세계를 재현하는 데에 집중한 반면, 인상주의는 작가가 실제로 보고 느끼고 겪은 현실을 화면 안에 담아내고자 한 것이 가장 극명한 차이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실제 예술 현장은 과거의 유산을 거절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고 있었지만 보수적인 아카데미에서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즉 아카데미의 승인을 받지 못한 예술은 역사에서 제외되었고 권력자들은 예술을 그들만의 전유물로 여기면서 민중은 예술을 향유할 수 없는 사회 구조를 유지하려 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예술가들은 이러한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고 지식인, 학자, 청년들과 함께 관습과 제도가 예술가의 창의성과 실험을 제한하는 행태에 반발하여 미술관과 같은 권위적 예술 공간에서 전시하기를 거절하는 사회적 행동을 제안하게 되었다. 이처럼 젊고 열정적인 예술가들은 고루한 아카데미즘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과 현실 속으로 침투하여 길거리와 담장을 전시장 대신 활용하였다. 그들은 단순히 바깥으로만 향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바깥으로 나오면서 기존의 미술 형식, 이미지, 서사를 재해석하거나 아예 없애버리고 다른 언어, 방식, 표현을 사용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20세기 중반을 지나서야 미술이 스스로 오랜 전통 영역을 벗어나 현실로 진입했고 드디어 대중과의 만남을 찾아간 것이다. (그림1, 그림2)

그림1. 고전주의 가치관: 양식화된 세계의 재현
그림2. 다니엘 뷔렌 <샌드위치 맨>: 대중과의 만남, 길거리 예술
물론 이러한 예술적 활동이 대중의 찬사를 곧바로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프닝과 같은 비정형적인 활동은 역사나 도상학을 이해하지 않더라고 현실적 고민과 시사점을 공유하고 있기에 선입견을 배제하고 접근한다면 오히려 더 수월하게 현실의 고민을 예술이 다룰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새로운 시도에 마음을 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최근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진 용어인 “공공미술”은 앞서 간략하게 살펴본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미술은 오랫동안 전시장 안에서 바라보는 방식, 즉 관람이라는 형식으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바깥으로 향한 예술가들의 활동은 미술이 수동적인 관조/관람이 아닌 예술 작업에 동참하거나 개입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주었다. 무엇보다 관객이 창작에 관여하거나 간섭을 할 수 있다는 점은 획기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수많은 비엔날레들은 경쟁하듯 예술가와 관객의 관계를 바꾸거나 창작가나 조력자로 비예술인과의 협업을 하는 기획이 이어졌다. 예술과 공공, 공공과 예술은 일방적으로 야외에 작품을 설치하거나 전시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도 없고 그것이 곧 예술 향유로 이어진다는 상투적 발상도 이제는 바뀌어야 할 때이다.
”공공적·사회적 미술은 마을, 지역, 도시의 지속가능한 문화적 인프라, 흥미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건축, 디자인, 인문학과 과학을 융합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사상”
요셉 보이스는 1982년 카셀 도큐멘타 (Kassel Documenta)에서 “7000그루 떡갈나무 (7000 oaks)”란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카셀 인근에서 채취된 현무암 덩어리를 1미터 가량 높이로 재단하여 도큐멘터 본전시장 앞 잔디밭에 쌓아놓은 뒤 5년 간 현무암 덩어리 하나와 떡갈나무 한 그루를 함께 심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는 자연과 문명, 인간의 이기심과 환경의 미래를 함께 만들자는 메시지를 담은 공공적 성격의 미술 작업으로 이후 환경주의를 대표하는 프로젝트로 확대된다. “7000그루 떡갈나무”는 우리가 흔히 미술에 기대하는 ‘미적 체험’ 혹은 ‘아름다움을 위한 장식 효과’와는 거리가 멀다. 아직까지도 공공미술이라는 용어는 도시 미화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공공미술을 행정 논리로 풀어내고 일시적으로 특정 지역에 장식 효과를 높이는 사업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물론 건축과 디자인의 바람직한 개입으로 도시를 보기 좋고 효과적으로 도시를 소개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문화적 요구와 필요에 부응하여 일괄적이고 획일적 방식으로 지역의 고유한 성격과 느낌을 인위적으로 캐릭터화시키고 기능의 측면만 강조한 엔지니어리즘으로 오히려 지역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글은 예술이 부동산 가치를 실질적으로 상승시켜준다는 의미로써 ‘동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는 급변하고 있으며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우리가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어쩌면 신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통계학에 의존하기 이전에 과연 살만한 곳, 충만한 삶을 일구는 가치가 어디에 있고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게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공미술은 과거 새마을운동 시대에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가리는 것과 같은 위선적 도구가 아니다. 공공적·사회적 미술은 마을, 지역, 도시의 지속가능한 문화적 인프라, 흥미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건축, 디자인, 인문학과 과학을 융합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사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성공만을 추구하는 경쟁의 방식을 버리고 시민의 자발성과 예술가의 자율성 그리고 제도와 자본의 지원이 만나서 가치 있는 삶을 만들자는 공공미술의 본래 취지임을 잊지 말자.
[참조: 독일 카셀 도큐멘타는 5년마다 열리는 대규모 미술행사로 1955년에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지역 전체가 파괴된 카셀 지역을 당시 카셀 대학교 교수인 아놀드 보데(Anold Bode)가 예술로 재생하자는 취지로 창설된 후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높은 예술행사 중 하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