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성공은 사회적 합의에 달려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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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하게 추웠던 1998년 겨울

2020년 2월 9일은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노사정 대표들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한 지 22년째 되는 날이다. 잠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보면,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1997년 말 당시 외환보유액은 30~40억 달러에 불과했다. 

한보그룹 부도를 신호탄으로 기아자동차 법정관리 신청 등 속절없이 무너지던 한국 경제는 국제금융기구(이하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며 경제 주권을 내어주게 됐다. 1997년 12월 3일, 210억 달러를 가지고 점령군 사령관처럼 등장한 IMF 캉드쉬 총재는 400%가 넘던 부채비율을 200%까지 낮추고 금리를 25%까지 인상하는 등 혹독한 구조조정을 강요했다. 

30대 재벌 중 19개가 해체되고 1만 7,000여 개 기업이 사라졌다. 33개였던 시중은행은 16개로 줄었고, 33개 종합금융회사 중 32개가 폐쇄됐으며, 실업률은 1997년 2.6%(56만 8,000명)에서 1998년 7.0%(149만 명)로 급상승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96년 말~1997년 초까지 이어진 노동법 개정 갈등과 양 노총 총파업을 겪으며 김영삼 대통령의 리더십은 급격히 약화됐고,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 후보가 아직 취임하기 전인 정권교체기에 외환위기가 발생해 정치 사회적 불확실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국민들은 전 세계가 감탄했던 ‘금 모으기’로 단결하고, 노사정은 ‘사회협약’을 통해 위기 극복에 힘을 실어줬다. 그 결과 2001년 8월 23일 IMF에서 빌린 195억 달러를 조기 상환하고 IMF 관리체제를 졸업했다. 당초 민주노총까지 참여했던 ‘2·9 사회협약’은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노사관계 불안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해소하고, 적극적인 실업대책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한국병의 전조, ‘달빛 증후군’에 걸린 2020년 대한민국

새삼스럽게 IMF(I’m Fired)의 아픈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현재의 나라 상황이 그때 못지않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한국은 그때와 다르다. 경제규모는 세계 11위의 대국으로 성장했고, 외환보유액은 4,063억 2,000만 달러(2019년 10월 현재)로 세계 9위권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파리클럽에 가입된 순채권국이다. 에스앤피(S&P), 피치, 무디스 등 국제신용평가기관이 평가한 대외신용도는 일본보다 높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상황판은 온통 경고등으로 가득하다. 무엇보다 외환위기 전 9%대였던 경제성장률은 2%도 장담하기 어렵고, 중후장대 주력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고 선진국과 중국 사이에서 비틀거린다. 

성장률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 역량도 뚝뚝 떨어져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해 성장률 2%를 방어하고 관제단기일자리로 고용지표를 관리하는 실정이다. 노동존중정책이라 하는데 역설적으로 자영업 기반이 파괴되고 비정규직이 증가하는 등 일자리 불안과 빈부격차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우려되는 것은 산업화시대의 규제박스에 정치적 불확실성과 지정학적 리스크가 더해져 투자가 살아나지 않고, 잠재성장률의 급속한 하락(2001~2005년 5.0~5.2%, 2016~2020년 2.7~2.8%) 저변에 자리하고 있는 인구감소와 생산성 하락이 개선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경제라는 거함이 가라앉고, 일자리 생태계가 무너져도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마치 망각의 적응과정을 통해 원하는 것만 보려고 하는 선택적 인지, 자기기만과 같다. 여야와 정부가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포퓰리즘 경쟁을 하며 돈을 풀어 대고, 국민들은 혀를 차면서도 못 먹으면 나만 바보라는 듯이 줄을 선다. 적자 공기업의 성과급 잔치, 영업이익률이 마이너스인 독과점대기업의 고율 임금 인상, 그럴듯한 수식어를 붙인 온갖 복지수당과 급여 등 기성세대의 무책임한 이기주의가 난무한다. 

온 나라가 달빛은 태양 빛의 반사광에 불과함에도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착각하는 ‘달빛 증후군’에 걸려 있는 듯하다. 가계, 기업, 나라를 불문하고 성장과 수익 없이 빚내서 잔치하면 그 결과는 불문가지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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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미래를 향한 개혁과 K-노동(Work) 4.0

나라 경제를 재도약시키고 빈부격차를 줄이려면 기업가정신과 노동윤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 2020년 대한민국을 보라. 공동소유라는 노동당 이념과 강력한 노동조합의 포로가 돼 고임금·저효율로 산업기반이 무너진 1970년대의 영국, 통일의 감격이 가시기도 전에 높은 실업률과 저성장으로 유럽의 병자가 된 1990년대의 독일, 인구감소와 구조개혁 실패로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일본이 겪었던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고 있다. ‘친 노동’이라 불리우는 과속 역주행 노동정책, 공공부문의 방만한 팽창, 불안한 남북관계, 잠재성장률을 밑도는 경제성장률, 생산인구감소, 구조조정 실종. 이름하여 ‘한국병(韓國病)’의 전조증상이다. 

모든 정책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지만 영국은 철의 여인 대처의 노동개혁, 독일은 정권보다 국가를 앞세운 슈뢰더의 하르쯔 개혁, 일본은 절치부심한 아베의 세 개의 화살을 기반으로 재도약할 수 있었다. 2020년 대한민국에도 규제타파, 구조개혁, 노동혁신, 신성장동력 발굴, 혁신성장 등 재도약의 해법은 이미 나와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를 감당할 의지와 역량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네 번째 산업혁명기, 혁신하지 않으면 낙오하는 ‘디지털 대항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선진국들은 저만치 앞서 가고, 중국도 우리를 제치고 있다. 낡은 껍질을 벗고 새것으로 갈아입는 혁신(革新)에는 창조와 파괴의 고통이 따르고, 신·구 질서를 둘러싼 이익 갈등을 피할 수 없다. 

산업과 일자리가 농업(1차 산업)에서 제조업(2차 산업), 서비스업(3차 산업)으로 이동했듯 지식산업(4차 산업)으로 바뀌며 기존의 일자리가 사라진다. 결국 혁신 성공의 여부는 미래비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갈등관리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8년 2월, 위기극복을 위해 사회협약을 맺었듯이 2020년 지금 새로운 미래를 디자인하는 사회적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산업 4.0’(Industrie 4.0)으로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한 독일은 ‘노동 4.0(Arbeiten 4.0)’ 백서를 내고 노동의 유연화, 노동의 자기결정권 보장, 평생직업교육 강화, 플랫폼 노동자의 조합결성과 협상권 부여, 사회보장제도 재구축과 디지털 과세 등 노동체제 혁신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우리도 하루속히 퇴행적인 진영싸움과 망국적 포퓰리즘에서 벗어나 새로운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노동의 미래를 담은 ‘한국형 노동 4.0(K-work 4.0)’ 만들기에 나서야 한다.

 

사회적 대화, 어떻게 만들고 실행할 것인가? 

중앙(경제사회노동위원회), 지역(광주형 일자리), 산업(공유경제, 핀테크, 디지털 헬스케어) 등 각 단위에서 사회적 대화가 추진되고 있지만 하나같이 ‘죽음의 계곡’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 정답을 정해 놓은 관제동원형 사회적 합의는 절차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도구로서는 일시적으로 유용할지 모르나 지속가능성이 없음을 이미 경험했다. 

노사, 전문가, 시민사회가 함께 디자인하고 정부와 정치권이 지원하는 사회적 대화체제(Social Dialogue System)를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일찍이 국제노동기구(ILO)도 제시했듯 사회적 대화가 성공하려면 ① 상호존중의 파트너십과 사회적 대화에 대한 헌신, ② 상황인식과 위기의식의 공유, ③ 노사단체 등의 조직적 역량과 대표성, ④ 사회적 대화에 대한 정부와 국회의 존중과 지원이라는 네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우선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비롯한 사회적 대화체제를 대통령과 정권의 품에서 정치적 중립지대로 옮겨 명실상부한 공론의 장, 열린 플랫폼(open platform)이 될 수 있도록 개방하고, 모범답안을 던져주고 합의해오라고 요구하는 자세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다. 더디더라도 함께 해야 반쪽짜리가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하자. 1998년,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지만 우리는 하나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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