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화해, 치유, 공감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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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지만 세계적인 스토리를 간직한 도시

세계 몇몇 도시는 세계인들이 익히 알만한 유명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대단한 풍광과 산수 절경을 품고 있지 않아도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마법 같은 스토리가 존재한다.

누구나 어릴 때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벌거벗은 임금님> 혹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를 읽고 자랐을 것이다. 그 중 <인어공주>는 아름답지만 슬픈 새드 엔딩(sad-ending) 작품인데, 육지의 왕자를 만나기 위해 마녀에게 영혼까지 저당 잡히지만, 결국 사랑하는 왕자를 위해 스스로 물거품이 되고 마는 인어공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코펜하겐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인 인어공주 동상은 조각가 에드바르트 에릭센이 1913년 제작, 공개했다. 이 동상은 명성에 비해 턱없이 작은 80cm 크기에 볼품도 없어서 큰 기대를 하고 간 사람들은 대부분 실망하게 된다. 100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팔과 머리가 잘리고 페인트를 전신에 뒤집어쓰는 등 수많은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인어공주 동상은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명물이다. 단순히 동상이 아니라 슬프고 애잔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세계적 스토리가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런던에 있는 베이커 스트리트(Baker Street)에 가면 셜록 홈즈 박물관, 비틀즈 스토어와 함께 유명한 횡단보도가 365일 관광객을 맞는다.

세기의 그룹, 비틀즈의 유명한 앨범에 실린, 런던 에비로드 횡단보도를 멤버 4명이 줄지어 건너는 이 씬은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명장면이다. 왕복 2차선의 평범하고 볼품없는 이 도로가 런던을 찾는 젊은 관광객의 필수 방문 코스이자 인증샷 포스트가 됐다.

사진촬영을 위해 아침부터 대기 줄이 생기고 관광객의 인증샷을 위해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자동차들도 기꺼이 브레이크를 밟고 멈춰서 기다려준다. 이 길을 지나는 모두가 상상 속 비틀즈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동화된다. 글과 말이 아닌 감성 그 자체가 멋진 스토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독일 장크트고아르스하우젠 부근의 라인 강 기슭에는 높이 솟아 있는 큰 절벽 바위가 있는데 그 유명한 로렐라이(Loreley)다. 로렐라이는 독일어로 소리가 나는 바위란 뜻이
다. 저녁 노을이 질 무렵, 바위 위에 올라 머리를 빗으며 노래를 부르는 인어에 매혹돼 수많은 배들이 암초에 부딪혀 침몰했다는 로렐라이의 전설이 전해오는 언덕이다.

그러나 슬프고 애잔한 전설을 품고 있는 로렐라이 언덕을 실제로 가보면, 아마도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곧 실망할지도 모른다. 라인 강가를 바라보는 멋진 풍광이 일품이지만, 관광지로서의 로렐라이 언덕은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전 목걸이(동전을 납작이 눌러 만들어주는) 기념품 하나를 가져오는 것 외에는 그저 그렇다(필자는 그랬다. 감성부족인지는 모르지만).

그렇지만 이 유명한 로렐라이 전설과 로렐라이 언덕은 역시나 세계적이며, 훌륭한 스토레텔링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평범하지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스토리를 간직한 도시는 이외에도 얼마든지 많다. 훌륭한 스토리는 공감하고 나누는데 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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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야기를 가진 국내 도시

하늘 높이 올라만 가는 고층빌딩과 아파트 숲으로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은 삭막해져만 가는 느낌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곱씹어 보면 도시는 풍성한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다. 각 도시들은 도시브랜딩과 이미지, 지역관광, 역사유적등을 활용해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야기를 품은 고개…무악재, 아리랑고개, 미아리고개, 문경새재

서대문 무악재는 고양, 은평에서 서울 중심으로 이어지는 초입에 위치한 곳이다. 무악재는 원래는 ‘모아재’, ‘모이재’로 불린 고개였다. 일제강점기 한양 북서부를 왕래하는 보부상과 행인들이 붐비던 곳이었고 서대문에 진입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무시무시한 인왕산 호랑이가 수시로 출몰했고, 행인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다. 또 행인 10명이 모이면 앞뒤로 호위병을 세워 고개를 올랐다 해서 ‘모아재’로 불리다가 추후 무악재로 바뀌었다.

‘호랑이 출몰’이라는 섬뜩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를 담은 곳이지만, 서울 시민들이 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는 의문이다. ‘스토리텔링을 잘 활용해 지역 관광소재로 발전시킬 수 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돈암동 아리랑고개는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요리업자들이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용해 고급 요정을 꾸며놓고 손님들을 끌기 위해 민요 '아리랑'의 이름을 붙여 아리랑고개라는 표목을 세운 것에서 유래됐다고도 하고, 또는 이곳에서 일제에 항거, 민족정신을 형상화한 영화 <아리랑>을 촬영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아리랑고개는 여기 말고도 전국에 여러 곳이 존재하는데 이는 ‘아리랑’이란 단어에 한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위치한 미아리고개는 한국 전쟁 당시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기 때문에 전쟁 발발 초기, 인민군과 우리 국군 사이의 교전이 자주 벌어진 곳이었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 피랍된 사람들도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가족을 배웅해야 했다.

수많은 애국지사와 저명인사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이 고개를 넘어 북한으로 납치됐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널리 알려진 대중가요인데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로 시작되는 이 노래의 가사는 이 고개가 담은 우리 현대사의 애달픈 사연을 담고 있다.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한 이야기겠지만 슬픈 노래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고 추억할만한 서울의 스토리 자원이기도 하다.

경북 문경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개 중 하나인 문경새재는 그 옛날 새들도 날다가 쉬어간다는 높고 험준한 고개였지만 지금은 가장 아름다운 옛길로 각광받고 있다. 한 해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곳으로, 주말이면 인파로 몸살을 앓는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이후로 약 500여 년 동안 한양과 영남을 잇는 가장 번듯한 길이었다. 당시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고개는 추풍령과 죽령이 있었으나 문경새재는 과거시험치는 선비들이 유독 고집했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 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어 문경새재를 택했다는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문경새재 과거길’은 훌륭한 스토레텔링 자원이자 성공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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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곳…피맛골, 익선동, 힙지로, 용산 열정도

서울의 골목 중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거리는 종로 피맛골이다. 도심재개발로 지금은 반쯤 철거되고 퇴색했지만 중년 이상의 서울시민이라면 대부분 옛 추억과 감성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고위관료와 양반들에게 지나가다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조선시대, 평민들에게는 비록 좁지만 마음 놓고 다닐수 있는 길이 필요했다.

종로통 큰길 뒤로 생긴 조그마한 골목길은 말을 피한다는 뜻으로 ‘피맛(皮馬)골’로 불리며, 평민들을 위한 길이 됐다. 가난한 평민들의 길이였기에 저렴한 국밥집, 막걸릿집, 국숫집들이 들어서고 현재까지도 우리에겐 아련하고 소중한 이야기를 담은 길로 남아 있다.

피맛골의 정서를 가급적 훼손하지 않고 가꾼다면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스토리텔링 관광코스가 될 것이다. 너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식당 대신 이처럼 인심 훈훈하고 사람 내음 가득한 장소가 많이 자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신(新)피맛골이 탄생할 수 있는 여지는 아직 많다.

종로 3가에는 신•구세대가 만나는 독특한 구역이 있다. 돈의동과 익선동이 바로 그곳이다. ‘어르신거리’, ‘송해길’이라 불리는 종로 3가 뒷골목 길은 주로 60~70대 노년층이 자주 찾는 곳이지만 도로 건너 맞은 편에는 20~30대 청춘남녀들이 삼삼오오 방문하는 그들만의 핫플레이스가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소문난 맛집과 패션, 기프트샵, 카페가 즐비해서 익선동은 서울의 가장 오래되고 낡은 한옥마을이었지만, 이젠 서울의 중심 관광지가 됐다.

좁은 도로를 마주하고 어르신과 젊은 세대가 함께 그들만의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이 곳 역시 멋진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다. 언젠가 신•구세대가 함께하는 문화 아이템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을지로3가역 인근에는 뉴트로(New + Retro) 열풍을 일으킨 새로운 상권이 등장했다. 일명 ‘힙지로(힙한 + 을지로)’로 불리는 이곳 또한 복고풍의 추억과 신세대의 감성이 함께 어우러진다. 낡은 인쇄소 건물들이 밀집한 사이로 개성 있는 카페와 젊은 감각의 맛집이 들어서고 수십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오래된 가게) 수십 곳이 당당히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넥타이맨과 인쇄•철공소 직원, 젊은 청춘 세대가 함께 지역 곳곳을 누비며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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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역과 효창공원역 사이, 재개발이 무산돼 빌딩 숲 한복판에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옛 인쇄소 골목에 청년상인들이 자리 잡고 도시의 새로운 활력소를 만들어가고 있는 곳, ‘용산 열정도’라 불리는 곳은 젊은이들이 열정을 불사르는 신세대 핫플레이스가 됐다.

단순히 인기 있는 몇몇 가게가 아니라 이 골목을 함께하는 이들은 감성과 문화를 공유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아이디어 넘치는 가게 이름, 독특한 판촉 슬로건, 직원들의 유니폼 문구에도 재치가 넘쳐난다.

이렇듯 도시는 상상 속 이야기를 토대로 멋진 스토리와 도시민의 역사 속 삶의 애환을 담고, 세대 간의 갈등을 표출하면서도 때론 화해하고 치유하며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다.

그저 밋밋하고 평범한 곳이라도 미래 세대가 꿈꾸는 소망을 맘껏 그려낼 수도 있다. 도시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있는 도시는 더 끌리고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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