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와 일하는 방식의 혁신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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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계룡산 자락 대명리 빈 들판에는 잿빛 겨울이 가득하다. 여행자의 안식처가 됐던 성도관(成道館) 앞마당 살구나무도 잎을 다 떨궜고, 열 걸음 오른편 나무에는 하회탈을 닮은 모과 대여섯 개가 힘겹게 매달려 있다.

저수지 지나 논길 끝 모퉁이에 자리한 버스 정류소에는 낡은 빈 의자와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이 묘한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상월의 명물 고구마밭도 베트남 농부들의 명랑한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얼어붙은 트랙터 바퀴 자국만 선명하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 노란 버스는 유치원생이 아니라 외국인노동자를 실어 나른다. 하기야 외국인이 아니면 가정도 못 이루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마을이 어디 이곳 뿐이던가.

인적이 끊긴 것은 대학 캠퍼스도 마찬가지다. 텅 빈 운동장에 불 꺼진 기숙사, 적막하다. 하지만 강의실이 사이버 공간으로 옮겨졌을 뿐 수업은 계속된다. 화요일 오후는 학습관리시스템(LMS) 녹화영상수업과 별도로 ‘GGU 노동정책론’ 실시간 영상 특강이 있는 날이다.

줌 미팅 방을 열자 벌써 몇몇 학생은 입장해서 대기 중이고, 재능기부를 해주기로 한 서울 K대학의 P교수도 마이크 테스트 중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열정적인 강의와 생기 넘치는 질의답변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기며 진행됐다.

소통의 결핍 속에 녹화영상 시청과 과제에 지친 학생들에게 전문가들과 직접 대화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인데, 강사와 학생들 모두 만족스러워한다. 노동정책의 최고전문가인 전·현직 관료, 공공기관장, 타 대학교수, 노사단체 정책담당자 등이 기꺼이 재능기부를 해주었다.

강사는 서울, 세종, 울산, 진주, 제천 등 각자의 일터에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 역시 집, 카페, 학원 휴게실, 자동차 등 인터넷 접속이 되는 곳이면 장소의 제약 없이 수업에 참여한다.

목요일의 공공정책사례연구는 학생들의 아르바이트나 취업준비학원 강의가 끝나는 저녁 시간에 역시 온라인 영상토론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마이크가 엉키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영상토론과 자료화면공유도 제법 익숙해졌다.

인적이 드문 계룡산 교수 연구실에 앉아 전국 곳곳에 있는 학생들과 막힘없이 쌍방향 실시간으로 진행하는 수업,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바꿔 놓은 대학 풍경의 한 단면이다. 앞으로는 대부분의 대학이 고루한 상아탑을 허물고 ‘사이버 + 미네르바’로 변신하지 않으면 존속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재택근무 확산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사라지고,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혁신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기업들은 위드 코로나19 시대에 매우 기민하게 적응하고 있다. 유연근무, 모바일워크, 원격근무, 재택근무 등 다양한 명칭과 방식으로 진화하는 스마트워크(smart work)가 코로나19 대유행(pandemic) 이후 뉴 노멀(new normal)로 자리 잡았다. 구글, 아마존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에서나 행해지는 줄 알았던 재택근무가 코로나19를 계기로 국내기업에서도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올해 8월 고용노동부가 기업정보플랫폼 잡플래닛에 위탁해 5인 이상 사업장의 인사담당자 400명과 근로자 8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재택근무 활용실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 기업 중 48.8%가 재택근무를 운영하고, 기업 규모별 편차도 크지 않았다(10∼29인 43.9%, 30∼99인 42.7%, 100~299인 54.0%, 300인 이상 51.5%).

업종별로는 금융 및 보험업(66.7%), 예술·스포츠 및 여가 관련 서비스업(66.7%), 교육서비스업(62.5%), 정보통신업(61.5%) 등이 높았다. 아직까지는 특정 직무나 근로자 등 범위를 한정해 실시하거나(53.3%) 10% 미만 근로자만 활용(40.0%)하는 등 부분적으로 실시하는 비율이 높지만, 재택근무로 인해 업무효율이 높아졌다는 기업(66.7%)과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계속 시행하겠다는 기업(51.8%)이 적지 않았다.

9월 발표된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2019년 기준 국내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공기업 9개소 제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응답기업 69개소 중 91.3%가 재택근무를 시행 중이거나 곧 시행할 예정이라고 답한 것이다.

다만, 재택근무는 주로 사무직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재택근무 방식은 ‘교대조 편성 등 순환’ 방식이 44.4%로 가장 많고, 건강 돌봄 임신 등의 사유를 바탕으로 ‘재택근무 필요인력을 선별하거나 개인이 신청하는 방식’이 27.0%, ‘필수인력을 제외한 전 직원 재택근무’ 시행 기업은 15.9%였다.

재택근무 시 생산성은 ‘정상 근무 대비 90% 이상’이란 평가가 46.8%, ‘80∼89%’가 25.5%, ‘70∼79%’가 17.0%, ‘70% 미만’은 10.6%였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이 해소된 후에도 재택근무가 확산·활용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53.2%가 ‘확산될 것’이라고 답했고, 33.9%는 ‘원상 복귀될 것’, 12.9%는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처음에는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자율 출퇴근제, 순환근무제 등으로 시작했던 재택근무가 실제로 해보니 우려했던 것보다 효과가 좋다는 인식과 경험이 확산되면서 이제는 일하는 방식의 하나로 일상화되고 있다.

정부가 ‘K-방역’을 자랑하며 매일 똑같은 포맷에 숫자 갈아 끼운 2~3주짜리 단기대책을 브리핑할 때, 기업들은 위기 속에서도 기업활동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체제를 발 빠르게 구축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독자생존의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어디 기업뿐인가. 코로나19에 걸리면 신상이 털리고, 몇 년을 준비한 임용고사에 응시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나라의 국민은 자기 몸을 스스로 지켜야만 한다.

 

재택근무의 장단점

한편, 재택근무를 실시한 기업들과 근로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기업들이 꼽은 재택근무의 긍정적 효과는 감염병 위기 대처능력 강화(71.8%) 외에도 근로자의 직무만족도 증가(58.5%), 업무 효율성 증가(23.1%), 사무공간 등 비용절감(11.3%), 인력 유출방지 및 인재 영입(6.7%) 등 다양하다.

사실 미국, 유럽, 일본의 주요 정보기술(IT)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는 코로나19 이전에 이미 스마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업무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큰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 BT는 일찍이 1993년부터 ‘BT워크스타일’이라는 탄력근무제를 도입했다. 전체 직원의 85%가 스마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한 재택근무, 원격근무, 자율 출퇴근제 등에 참여하였는데, 이로 인해 탄력근무 직원들의 생산성이 20~60% 정도 증가하고, 사무공간 감소로 2006년까지 9억 5,000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절감했다고 한다.

올해 초 삼일회계법인이 소개한 해외기업들의 스마트워크 사례를 보면 시간과 장소의 유연화가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이슈리포트, 2020.4). 근로시간 유연화의 예로 구글은 근무시간의 20%를 직원이 하고 싶은 일에 쓰는 ‘20%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바이엘은 2001년부터 ‘근로시간계좌제’를, 유니클로는 2015년부터 하루 10시간 일하면서 일주일에 4일만 출근하는 ‘주 4일 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근무장소를 유연화한 시스코는 모바일 오피스를 구축해 직원의 32%가 모바일 워커이고, 원격접속만으로 일하는 직원도 6%에 달한다. 도요타도 2016년부터 재택근무제를 실시해 일주일에 2시간만 회사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집에서 근무하는 직군이 본사 임직원의 35% 수준에 달한다. 아지노모토는 2017년부터 재택근무를 도입해 관리직은 원칙적으로 주 1회 재택근무를 의무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코로나19로 디지털 경제의 키워드인 온라인화와 스마트워크가 가속화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생활에서 체험하고 있듯이 쇼핑, 엔터테인먼트, 건강서비스, 교육 등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 소비문화의 온라인화가 확산되고 있다.

기업의 일하는 방식과 문화에서는 스마트워크가 가속화되면서 전사적자원관리(ERP), 그룹웨어 등 기업용 소프트웨어 수요가 큰 폭으로 증가하고, 공장에서도 무인화, 자동화를 요체로 한 스마트 팩토리가 확대되고 있다.

코로나19는 일하기 좋은 기업의 기준도 바꾸고 있다. 올해 9월, 잡플래닛이 발표한 상반기 '일하기 좋은 기업 30' 리스트를 보면, 공격적으로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등 임직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적극적인 대처를 하는 기업들이 ‘좋은 일자리’로 평가받고 있다.

비대면 근무 경험과 일하는 방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상시 재택근무로 대표되는 스마트워크가 전면적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트위터의 최고인사책임자(CHO) 제니퍼 크리스티도 “처음에는 원격근무를 망설였는데 지금은 충분히 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젠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고,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는 “10년 안에 전 직원의 절반이 원격근무를 하고” 인재풀을 넓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국내에서도 올해 9월,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288개사의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10명 중 7명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재택근무가 새로운 일하는 방식으로 정착될 것’이라 답했고, 대기업과 중견기업 10곳 중 약 4곳 정도가 상시 재택근무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마냥 긍정적 신호와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앞서 소개한 8월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재택근무를 운영하지 않는 기업의 이유를 보면, 인사노무관리의 어려움(45.9%), 사업주 또는 경영진의 반대(35.1%), 인프라 구축 등 비용 부담(34.2%), 도입방법, 절차, 규정을 몰라서(11.2%), 근로자 또는 노조의 반대(2.4%)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재택근무 시행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의사소통 곤란(62.6%), 재택근무 곤란 직무와의 형평성 문제(44.1%), 성과관리·평가의 어려움(40.0%), 기업정보 유출 우려(14.9%), 인프라 비용 부담(9.0%)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한편, 노동자들은 재택근무를 망설이게 하는 이유로 근로시간과 휴게시간의 경계 모호(45.8%), 업무공간 미분리로 인한 효율 저하(44.8%), 상호작용 부재에 따른 소외감(30.4%), 업무성과 도출에 대한 부담(27.4%), 승진 등 인사상 불이익 우려(16.7%), 가사, 육아 병행에 따른 피곤감(9.0%) 등을 꼽고 있다.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코로나19 재택근무가 잉여인력 규모 확인과 인력 구조조정의 테스트 베드(test bed)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상당하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

하지만 재택근무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추세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통제의 어려움 등 원격근무의 단점을 극복하고, 구성원의 자발적 참여와 일의 의미에 대한 내적 동기(motivation)를 자극해 원격근무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찍이 미국, 일본, 네덜란드 정부가 스마트워크 확산에 앞장섰듯이 우리 정부도 재택근무가 방역 차원을 넘어서 스마트워크, 나아가 ‘일하는 방식의 혁신’과 ‘기업문화의 전환’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인프라 구축에 나서야 한다.

올해 9월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재택근무 종합매뉴얼」은 ‘성공적인 재택근무 도입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기에는 태부족하다. 무엇보다도 근로시간·연장근로·휴식시간, 복무관리와 성과평가, 임금, 개인정보 보호 및 보안 대책 등 구체적인 법적 쟁점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행정공무원들만 탓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매뉴얼이 안고 있는 딜레마의 근본적인 이유는 산업사회를 전제로 마련된 현행 노동법제가 코로나19가 앞당긴 디지털 사회와 비대면 노동에 전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해법은 ‘디지털 혁신에 대한 노동법 제도의 지체’를 개혁해서 노사의 자율 주권을 보장하고, 획일적 규제로 경직된 ‘고용억제형 노동정책’을 전면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진영의 깃발만 쫓는 무모한 폭주가 멈춰지지 않는 한 진짜 개혁은 요원해 보인다.

정부는 오히려 생존 위기에 몰린 중소기업에 대해 주 52시간 상한제를 강행하고, 정치권에서는 노자 분열과 청홍 갈등의 확대재생산과 처벌만능주의가 심화되고, 만년적자를 면치 못하는 회사의 노조는 구조조정의 삭풍 앞에서도 자멸의 길로 치닫는 임금파업에 나서는 등 한국 노동체제의 시곗바늘은 거꾸로 돌고 있다.

어느덧 빈산 위에는 겨울밤이 내려앉았고, 빈 들판에는 살을 에는 찬 바람이 간다. 사회적 연대와 노동개혁의 대오는 무너지고 미래로 이끄는 등불도 꺼졌다. 아아, 시인 이제하의 ‘빈 가슴으로 울며 소리 없이 나를 반기는’ 이는 저 산 너머 어디쯤 살고 있을까? 역병의 창궐로 힘들었던 2020년이 지나고 새해가 밝으면 임이 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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